프롤로그
낡은 수첩을 뒤적거렸다. 낮에 미래복지경영 사무실을 찾아온 후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뒤늦게 사회복지를 공부하려는 친구이다. 지나가는 말로 앞으로 다가올 미래사회에서 사회복지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이를 귀담아 들은 모양이었다.
후배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동안 나는 어느새 수첩을 펼치고 있었다. 내 수첩에는 많은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일을 이어주는 일은 내가 살아오는 동안 자연스런 습관처럼 되었다.
나의 만남은 모조리 길 위에서 이루어졌다.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났고, 길 위에서 사회복지의 현장을 만났다. 물론 내가 해온 일들은 나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스승의 가르침이 있었고, 동료, 선후배의 도움이 있었고, 이웃과 지역의 협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 나를 정원지기로 불러주신 하나님은 길 위에서 만난 인연과 그 모든 일들을 아름답게 꽃 피울 수 있도록 도우셨다.
‘사회복지인생’의 길을 정원으로 가꾸는 동안 시들한 곳에는 물과 거름을 주고, 빛을 받지 못하는 것은 양지바른 곳에 옮겨 심었다. 때로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말라 비틀어진 나무가 있다면 과감하게 뿌리를 뽑는 일도 필요했다.
사회복지 인생의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일을 사랑해야 하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올바르고 빠른 판단을 위해 명석한 두뇌도 필요했다. 명석한 두뇌, 뜨거운 심장, 부지런한 손발은 사회복지사라면 겸비해야 할 태도이다. 나는 후배들에게도 이 점을 자주 강조했다.
사회복지학 “사람이 사람답게, 인간이 인간냄새를 풍기며 살도록 도와주는 학문”이며 사회복지사는 이를 이루기 위해 돕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지니고 살아야 할 영속적인 가치관,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 자연에 대한 겸손함, 공동체의 함양, 자유, 회복, 온전한 인격을 이뤄가도록 돕는 일이 사회복지사의 고유 업무이다. 이는 인격존중과 책임성이 사회복지사의 윤리와 가치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복지는 무엇보다 사람에 관한 일이다. 사람과 직접 만나고 고충을 듣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을 만냐야 한다.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대안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은 더불어 함께 해야 한다는 가치관과 더불어 사회복지를 위한 삶에 헌신했던 지난날의 경험 때문이다.
사무실 창으로 황혼 빛이 들어온다. 자연의 흐름은 늘 정직하다. 하루라는 시간 속에서도 계절이라는 시간 속에서도, 또한 사람이 시간 속에서도 그러하다. 오늘 하루가 저물고, 한 계절이 지나고, 또 한해가 지나는 동안에도 자연은 시간이라는 순리를 거스르지 않았다.
한때는 그 시간 안에 머물지 않으려고 바쁘게 살았지만 세월은 정직했다. 나는 시간 속에서 그 시간만큼 일 해왔던 것이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는 않았다. 지금 내 곁에 있거나 아니면 떠나버린 사람들조차도 이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
팔순의 나이에 접어든 내 인생은 이제 황혼빛을 거둘 때가 되었다. 이제 긴 기도의 시간만 남아있다. ‘경천애인’ 하늘을 우러르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었는지를 살펴볼 시간이다. 경천애인은 내 모교의 교훈이다. 버스를 타고 사무실을 갈 때 한강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푸른 강물을 보면서 과연 나는 경천애인의 교훈을 얼마나 실천해왔던가 하고 자문해보기도 한다.
키 큰 나무가 뿌리로 빨아올린 물을 우듬지까지 공급할 수 있는 것은 흔들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바람에 흔들렸기에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줄기 끝까지 수액을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인생에도 종종 바람이 많이 불었다. 물론 몇몇 가지를 꺾을만한 세찬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바람 덕에 나는 살고자 하는 우듬지까지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내 인생의 바람이 되어 준 사람부터 햇볕이 되고 거름이 되어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내 그늘에서 쉬고 꽃을 찬양하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먼발치에서 나의 싹티움과 푸르름, 낙엽과 나목(나목)의 시간들을 지켜봐 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또한 지금도 사회복지의 현장에서 차가운 시냇물에 발을 담근 채 사람들이 지나갈 돌덩이를 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또 나는 기도한다. 이 모든 것을 예비하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한복음 6;39, 새 번역)
예수님은 당신의 존재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마음만큼 따라 살아왔던가. 생각해보면 자신은 없다. 하지만 그 발자취라도 따라 살고자 노력하였다.
이제 창밖은 어느새 어둠이다. 사무실을 나서야 할 때다. 오늘 사람의 마을에서 만난 그 사람들을 생각하며 길을 나선다. 내 굽은 어깨를 비추는 가로수 불빛에 길다란 그림자가 나보다 먼저 앞서 걸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