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47년 만의 평양 방문 (62회)
  제11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1

분단 47년 만에 조선기독교연맹(이하 조기련, 1946년 설립될 당시 명칭은 ‘북조선기독교연맹’이었으며, 1974년 ‘조선기독교연맹’으로 개칭했고, 199년 2월 또 다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으로 개칭했다.) 초청으로 KNCC대표가 북한을 방문했다. 

방문기간은 1992년 1월 7일부터 13일까지였다. 조기련 서기장 고기준 목사에게 초청장을 받은 것이 1991년 10월 27일이었다. 초청장에는 ‘신변 안전과 무사귀환을 담보합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이 초청장은 그동안 KNCC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온 결과였다. 

먼저 1984년 일본 도산소에서 열린 ‘동북아시아의 정의와 평화협의회’에는 비록 북한교회는 오지 않았지만, 자료를 보내주는 등 일말의 성과는 있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논의한 이 협의회에서 참석자들은 남북교회의 협의와 만남은 앞으로 서울이나 평양에서 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 협의에 따라 1990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한반도 평화통일협의회가 열렸을 때, 1992년 8월 평양에서 평화통일협의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후 남북교회는 1991년 11월 미국 NCC 총회에서 또 다시 만나 이듬해 8월에 열릴 평화통일협의회 평양개최를 재차 확인했다. 

그에 앞서(10월 27일) 이미 KNCC 총무인 나를 평양에 초청한 고기준 서기장은 나에게 “평양에 오시면 금강산 구경을 하시겠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웃으면서 “이번에는 저 혼자 방문을 하니 관광은 좀 곤란합니다. 다음에 많은 사람이 방문하게 될 때 관광을 좀 시켜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관광 대신에 목사가 북한 교회를 방문하게 되니 설교는 꼭 할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나는 북한을 방문하면 북한교회 대표들과 만나면 1990년 희년 준비를 하고, 8월에 열리는 평화통일협의회의 예배순서를 확정한 후 남북교회 교류 문제를 협의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동안 남북 정부는 고위급 회담을 통해 여러 차례 만남을 가져왔다. 1991년 12월 13일에 열린 남북 간 고위급 회담에서는 정원식 총리와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상호불가침과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도출해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민간차원에0서 공식적인 북한 방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북한을 방문하는 기간 동안 모든 언론에서는 나의 방북이 남북합의서 체결 후 첫 번째 민간차원의 방북이라고 보도하였다. 1992년 1월 9일자 <중앙일보>에서는 북한관영 중앙통신이 남북합의서가 채택된 이래 처음으로 민간인이 평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8일 보도했다고 전했다. 

1992년 1월 4일 토요일, 나는 김포공항에서 18시 45분에 CX411 비행기를 타고 21시 20분에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 구룡호텔에서 WCC의 박경서 박사를 만난 뒤 다음날 홍콩에서 17시 15분에 CA211 비행기를 타고 20시에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비행장에는 중국기독교협의회 환완자오 부회장과 실무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환완자오 부회장은 “당신 형제들이 가지고 온 차를 타고 예약한 건국(JIAN_GUO)호텔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우리는 북한에서 보낸 차를 타고 건국호텔로 가서 대표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일정을 함께 논의했다. 
 
▲ 1991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열린 남북교회 평화통일협의회

다음날 환완자오 부회장을 다시 만난 나는 점심식사를 같이 하면서 한중교회 사이의 현안문제를 논의했다. 그동안 KNCC가 다져놓은 덕분인지 아주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나는 앞으로 중국교회와 남북교회 관계가 원활해지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점심식사 후에는 북한을 방문하기 위한 마지막 점검을 했다. 
 
화요일인 7일, 드디어 북한의 JS 비행기에 올랐다. 북경에서 15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17시 30분에 평양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에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꽃다발을 받고나니 무사히 북한 땅을 밟게 되었다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양에는 마침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남북교회의 만남을 환영하는 듯 했다. 나는 내 앞에 떨어져 내리는 하얀 눈을 손으로 받아 안았다. 

한편 순안공항의 흙을 밟는 동안 나의 머릿속에는 종로5가가 스쳐지나갔다. 나의 평양방문은 바로 그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기도와 염원덕분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기도와 염원 뒤에 수많은 사연을 잘 알기에 어느새 나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북한 요원의 안내를 받아 18시 30분쯤 공항귀빈실에 도착하니 조기련 위원장인 강영섭 목사와 고기준 목사, 그리고 기관원으로 보이는 몇 사람과 기자 몇이 서 있었다. 해외에서 몇 차례 본 고기준 복사가 내 옆으로 와서 북한에 온 소감을 이야기하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속으로 ‘아, 이것이 기자회견인가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선기독교도연맹 초청으로 분단 50년 만에 오게 된 것에 대해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 감격을 1천만 기독교인들과 7천만 민족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초청해주신 조선기독교연맹과 관계된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러자 기관원처럼 보이는 이가 “다 끝났습니까?:”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모여 있던 기자들이 서로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기관원으로 보이는 또 다른 이가 “예배사업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망설였더니 고기준 목사가 “12일 주일에 예배를 드리겠냐는 말입니다.”라고 통역을 해주었다. 그래서 “물론입니다.”라고 했더니 설교제목과 본문을 물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설교 본문은 예배소서 2장 13~18절이고, 제목은 “우리를 하나 되게 이끄시는 예수그리스도”라고 답했다. 

그 뒤 승용차를 타고 한 시간쯤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나지막한 산자락에 위치한 곳이었다. 저녁 8시가 다 된 시간이라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나는 숙소에 짐을 풀고, 선물로 가져온 정장 옷감을 들고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들어갔다. 

강영섭 목사와 고기준 목사가 나를 식사 자리로 안내하면서 “이것이 환영만찬입니다.”라고 말했다. 북한에서의 첫 저녁식사였다. 나와 박경서 박사는 따뜻한 환대의 식사를 하고 난 뒤 선물로 가져온 옷감을 전달했다. 

이후 숙소로 돌아와 생각해보니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기도를 올렸다. 1992년 1월 7일 평양에서 보낸 밤은 내가 살아온 50년의 삶에서 가장 감격스런 밤이었다. 그동안 통일운동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해온 모든 이들이 눈에 어른거렸다. 종로5가 사람들과 한국교회 사람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특히 그동안 수고한 KNCC 직원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마냥 감격에 겨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감격스런 기분 못지않게 내가 짊어진 짐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 짐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서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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