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화합과 디자인 강국을 꿈꾸며 (85회)
  제11장 새출발을 위한 준비 태세

동서화합, 남북화해의 소망을 안고 

무당파연합은 15대 총선에서 금권선거와 집권당의 견제로 억울하게 패배하였지만 나라를 위한 충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 여세와 결집력으로 우리는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영남을 주축으로 한 정치세력인 무당파가 호남의 적극적 지지를 받는 김대중 후보를 지지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지만 우리들의 충정은 분명했다. 

35여년 간 영남출신이 집권을 하면서 호남은 경제, 문화적으로 소외되어 있어 호남사람들의 울분과 함께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망국으로 치달을 정도였다.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궁극의 목표는 남북통일이다. 영남과 호남이 파벌의 이익과 지역감정에 매몰되어 싸우면 되겠는가. 

영호남의 화합이 시대의 대세이고 민족의 통일을 위한 국민의 과제인데, 한평생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죽음의 고비도 여러 번 남긴 김대중 선생이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영남의 무당파인 우리가 호남의 유력후보인 김대중 선생을 후원하는 것은 선거 도의상으로서나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다. 정치의 새바람을 일으킨다는 명분도 있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내가 하고자 하면 남도 해야 하고 내가 싫은 일은 남도 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무당파는 굳은 신념으로 주변의 비판과 방해공작을 뚫고 아래와 같이 선언을 했다. 
 
대전환기를 이끌 새로운 대통령의 선택 

선택기준으로는, 국민 대화합을 첫 번째로 선언하고, 툭히 정치적 전략의 산물인 영호남의 지역적 갈등을 해소하고, 남북통일 이전의 최대 과제로서 동서화합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외 미래정치를 지향하고, 덕치(德治)에 바탕을 두고 건전한 비판을 수용하며 법치주의를 신봉하고 경제회생의 능력이 있는 자라야 한다. 

추진방향으로는, 역사적 전환점에 선 현 시국상황을 깊이 인식하고 정치적 술수가 아닌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주축으로 하여, 상호 충분한 협의를 통해 대통령 후보 중 우리의 선택기준에 근접한 인물이 있다고 합의가 되면 지지할 것이다. 

1997년 10월 

군 출신 무당파로 최고위원이었던 박태준 회장은 칼 같은 카리스마로 가끔 우리를 난처하게 했다. 결의하기로 한날 안무혁 부장이 장로시험을 봐야 한다고 해서 모임을 하루 연기하자고 했는데, 박 회장은 단칼에 거절했다. 

무당파의 결집에 군 출신이면서 이북 출신 유권자들에게 영향력이 큰 안 부장의 힘이 꼭 필요했다. 나는 밤새도록 잠을 못자고 고민을 하다가 내가 불참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눈을 뜨자마자 교회로 가버렸다. 자연히 그날 모임은 연기되었다.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무당파가 힘을 쏟고 있는 와중에 DJ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후보 등록 직전에 터져 나온 이 사건으로 대선정국은 거대한 폭풍에 휩쓸렸다. 이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한 느낌이 든다. 만일 김대중 후보가 출마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5대 대선에서는 30만 표 차이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보수 진영 중심의 무당파연합이 세력을 모았으니, 30만 표 정도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4대, 15대 총선의 출마에서 금권선거와 지역 이기주의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무당파의 김대중 후보 지원활동으로 시대의 리더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자부한다.    
 
▲ 총선출마 시 지지자들과

대한민국 = 디자인 강국을 꿈꾸며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모 신문사 사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산업자원부 산하에 산업디자인대학원(IDAS)이라는 게 있는데 학장을 맡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산업자원부 국장들이 퇴임 후 가는 자리로 대단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잠시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뜻이었다. 

나는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대학이라면 교수인들 어떠랴.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정보통신산업, 문화산업, 관광산업 등을 우리들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천명하면서 많은 기업이 새로 출범하는 정부의 정책 방향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차에 IDAS에 부임하게 되었다. 

IDAS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대학원 대학교로 200여명의 석박사 과정만 있었다. 동숭동 서울미대가 있던 KIDF 내에 캠퍼스가 있었다. 모든 교수가 유럽에서 초빙된 디자이너로 수업을 모두 영어로 하였으며 1학기 이상 유럽의 자매 디자인학교에서 수학하는 특전이 주어져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양성하고자 하는 목표로 설립되었다. 

IDAS의 여러 교수와 토의하는 과정에서 디자인의 세계는 기대 이상으로 잠재력이 큰 분야라는 것을 새로 깨우치게 되었다. 패션만 디자인인 줄 알았는데, 이건 ‘바늘에서 우주선 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디자인의 범위는 실로 광범했다. 

인류가 도구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디자인의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기원전 약 7천~1만 년에서 시작된 농업혁명과 19세기의 산업혁명, 그리고 21세기이 정보화혁명으로 대별하는데, 디자인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농업혁명부터 산업혁명까지의 긴 기간을 <제1기 디자인시대>라 할 수 있으며, 그 당시에는 의식주를 위한 도구를 생산하는 장인은 디자이너인 동시에 기능공이었고 예술인이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주문자보다는 생산자의 목소리가 훨씬 커지게 되었다. 상품의 모양과 기능과 가격을 결정하는 생산자들을 더 값싸게, 더 빨리,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가 되었고 디자인은 기능과 예술 사이에서 갈등하는 어정쩡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가 <제2기 대자인시대>라 할수 있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 디지털의 정보화시대는 유통의 개념을 변화시켰으며, 소비자도 생산에 참여하는 프로슈머(prosumer)의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똑같은 것을 원치 않는다. 개개인의 취향과 욕구에 맞추어야 하는 이 시대는 노동과 자본 대신에 창조적 지식이 경쟁력을 좌우하게 된 것이다. 

생산자는 다시 예술인이 되어야 한다. 정보화 시대는 문화의 시대인 동시에 디자인의 시대일 수밖에 없다. <제3기 디자인시대>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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