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출마와 분루 (84회)
  제11장 새출발을 위한 준비 태세

14대 총선 출마와 분루

공직자로서 가 있는 자리마다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청춘을 마친 나는 그동안의 연륜과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또 다른 헌신을 하고 싶었다. 내 고향 합천의 발전을 위한 일꾼이 되는, 국회로의 도전이 그 시작이었다. 

"저는 이제껏 정부여당에서 평생토록 정도와 원칙을 신조로 하여, 이 나라 경제발전에, 환경보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충성을 다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업적을 높이 평가받아 왔습니다.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능력 있고 적극적이고 추진력이 강한, 참신한 인물로 평가받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이번에 공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합, 파벌, 밀실공천이라는 것입니다. 퇴임 후에도 저는 선비정신으로 정도를 지키면서 장관급으로 부름이 있어도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부 잘하고 무조건 맹종하는 사람만이 공천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똑똑하고, 유능한 합천의 인물로 기피하고 안 키우겠다는 뜻입니까?" 

이는 1992년 14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나의 심정을 토로한 연설문이다. 당시 민정당에 공천을 신청하러 갔더니 김윤환 사무총장은 지봉장학회 활동과 내 공직생활의 성과 등의 프로필이 담긴 봉투를 꺼내보더니 힐끗 보고는 한쪽으로 밀쳐버렸다. 

그리고 한마디 내뱉었다. “현역을 배제할 수 있나?” 나는 “세대교체는 없는 거냐?”고 되받았으나 현금봉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로 마음먹었다. 

고향 합천의 박씨 문중을 든든한 배경으로 믿고 12대와 1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강석정 씨를 사무장으로 하고 청년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지봉장학회를 통해 후진양성에 힘을 쏟고 환경청장 당시 ‘깨끗한 합천 만들기 운동’ 등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고 있던 나는 당시 1천 7백 호에 이르는 박 씨 문중과 무소속으로는 드물게 면, 동책까지 조직을 갖추어 경쟁력이 높았다. 

그런데 당시는 선거판에서 돈 봉투가 공공연히 돌아다녔다. 여당 후보가 밀리는 것이 확실해지자, 중앙당 사무총장이라는 사람이 수억 원의 자금을 가지고 여당 후보 사무실을 찾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소문이 난 그 다음날 밤중에 우리 선거캠프의 청년위원들이 자금살포의 현장을 덮쳤다. 청년위원들은 자동차를 부딪혀 가면서 도망가는 그들을 붙잡아 돈 봉투가 든 서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상대 후보를 선거법 위반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소했다. 상대 후보가 연락을 해와 협상하자고 했으나 청년들이 목숨 걸고 한 것을 어찌 협상할 수 있겠는가? 법으로 하자고 맞섰다. 증거가 확실하여 우리가 승소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긴다 한들 재선거를 한 자금도 없었고 지방민들의 마음만 떠나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는 없었다. 

이런 금권선거의 와중에서, “박판제가 대세다”라는 판세를 만들었는데도 800여 표가 모자라 분루를 삼켜야 했다. 부정투표로 재개표를 하고 싶어도 2천만 원이라는 거금이 필요했다. 결국 대법원까지 올라가서 소는 기각되었다. 

그 당시 유권자들의 의식은 “우리가 표를 주면 너는 출세하는 거 아니냐? 그러니 이때 돈 뜯어내는 게 당연하지.”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내가 아무리 깨끗하고 충정의 의지로 선거를 치르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 총선 유세에서

무당파로 15대 총선에 재도전 

14대에 분투하고 나니 조금 더 잘하면 승산도 있을 것 같고 한번 빼든 칼을 그냥 집어넣는 것은 사나이가 아닌 것 같아 15대에 다시 도전하게 되었다. 14대의 경험으로 볼 때 무소속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겠다 절감하고 무당파국민연합을 창당했다. 

한병채 전 의원을 대표로 하고 내가 총괄간사를 맡았다. 최고위원 겸 고문으로는 박태준 포철회장이 자리했고, 안무혁 전 안기부장, 감옥선, 오한구, 김중권, 이치호, 정동윤, 김동주, 임덕규 등 전직 국회의원이 함께 했다. 주요도시 지구당 창당준비위원도 전직 국회의원으로서 공천을 못 받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중앙당 최고위원 겸 합천지구당 위원장으로 출마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무당파의 신념을 밝혔다. 

무당파국민연합 거창∙합천 지구당 창당대회 연설문 

- 어떤 명분으로도 지역감정 유발은 철저해 배격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질적 한국병인 남북분할, 동서대결, 여기에도 우리 두 고을의 대결구도 같은 지역감정 유발은 어떤 명분, 어떤 경우에도 배격되어야 합니다. 

- 순수 무소속 연합의 출현은 민심의 반영인 동시에 천심인 것입니다.
현대사상은 자유와 평등으로 대변되고 있습니다. 평등은 능력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지할 정당이 없는 무소속 후보에게 통합선거법에 지나친 선거운동의 제한을 두는 것은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것이기에 경험과 경륜을 갖춘 순수 무소속 연합의 출현은 민심이요, 그것은 곧 천심인 것입니다....... 

1996년 2월 28일

거창합천지구당 창당대회가 지역민들의 환호와 관심 속에 출발하면서 나는 큰 바람을 일으켰으나 이번에도 합천 지역에서 자민련의 김용균 후보와 분할되어 거창지역에서 단독 출마한 이강두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두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그 지역에서는 무시 못할 정치세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당파가 교섭단체가 되는 것이 두려웠던 정부기관은 여러 각도에서 압력을 행사했다. 파출소장이 전화해서 “박판제 찍으면 안 된다.”고 했다는 말도 공공연히 들렸다. 

무소속과 무당파로 쓰라린 패배를 했을 당시에는 대단히 고통스럽고 불운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이 든다. 당선이 되었다면 정치자금 마련한다고 동분서주하다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 후 IDAS 운동 등 나라를 위해 해놓은 큰 일들을 생각하면 그때 정치인으로 가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선거덕분으로 구석구석 민초들을 만나서 민심과 현실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 비록 패하였지만 두 번의 선거에서 엄청난 인생 공부를 하였다. 지봉장학회가 남아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후에 강석정 사무장이 민선 군수 1기, 2기를 할 수 있은 초석을 이때 쌓았으니 얻은 게 많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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