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의 가르침, 무역구국(貿易救國) (4회)
  제1장 상해(上海) 시절

우리 집 거실에는 ‘무역구국(貿易救國)’ 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아버님이 가장 아끼는 물건중의 하나로 가보(家寶)인 셈이다. 전란통에도 반드시 챙겼고,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할 때도 선실에서 분실되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며 가까이에 두었다. 김구 주석 이 직접 쓴 휘호를 하사받은 것 이어서 명예로운 훈장과도 다름없었다.

아버님은 무역회사인 금화공사를 창립해 인삼 무역업에 종사하셨다.

일본어와 중국어가 능통했기에 아버님은 사업가로서의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 요원들을 은밀히 만나서 돌아가는 전황과 정세도 알려주었다. 무엇보다도 사업을 위해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국까지 자주 오가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훤히 꿰뚫고 계셨다.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운신의 폭이 좁은 임정 요원들로서는 아버님으로부터 얻는 국제 정보가 유익했을 것이다.

아버님이 무역한 인삼은 한국의 상징이자, 독립운동의 수단이었다. 인삼은 ‘하늘이 준 선물’ 로 여겨 만초지왕(萬草之王)이라 했다. 고려인삼은 중국에서는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영약(靈藥)’, ‘선약(仙藥)’, ‘불로초(不老草)’ 등으로 불리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조선 후기 이래 대중국 수출의 으뜸 상품이었던 인삼은 수입 대체재가 없는 독보적인 존재 여서 일제 때에도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현금 화폐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인삼의 주요 소비국이던 중국 수출은 상해로 집중되었다. 인삼의 최대 소비도시이자 집산지 인 상해를 통해 다시 중국 대륙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렇다 보니 인삼은 독립운동과는 멜 수 없는 인연으로 애환을 함께 했다. 인삼 판매 자금의 일부는 독립운동에 쓰였다. 인삼 판매 상점은 음성적인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으며 상점 판매나 행상을 통해 독립지사들의 자금을 조달했다.

해송양행(한진교), 김문공사(김시문), 원창공사(조상섭), 배달공사(옥관빈 : 후일 변절), 삼성공사(김홍서) 등이 대규모 인삼 거래상이었다. 이 회사들은 국외 독립운동가들이 거점으로 삼아· 연락처로 이용했다. 독립 운동가이자 언론인 우승규(禹弈圭)는 그들 인삼 판매상들을 ‘총대 없는 상인 독립군’이라 불렀다.

홍사단, 의열단, 민족혁명당 계열 인사들도 직접 인삼 행상으로 생계유지와 독립운동자금조달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윤봉길 의사도 잠시 인삼행상을 했다고 한다.

김시문의 김문공사(金文公司)가 인삼을 취급하기 시작한 데는 김구 주석의 권고가 있었다고 한다. 판매 이익의 일부가 독립자금으로 충당되었을 것이다.

인삼은 나라 잃은 산하의 눈물 같은 습기를 먹고 자라 독립을 위해 분투하는 한국 남아에게 피와 땀, 혼을 불어 넣어준 신약이었다. 그래서 고국을 떠난 인삼은 죽은 사람도 살리지만, 죽은 나라를 살리려는 영약(靈藥)이 되어 나라 찾는 청년들에게 이국에서 민족혼을 불어넣어 주었다.

인삼 무역을 위해 여러 나라를 다니시던 아버님은 나라 잃은 망국민이자 실향민이었다. 고향 평양을 떠나 중국에 정착해야 했고, 무역을 위해 사방을 다니는 처지이다 보니 나라를 잃은 설움과 한국인으로서 갖은 핍박을 몸소 체험했다고 훗날 술회하셨다.

“나라 없는 사람으로 살다 보니 광복은 내게도 절실했지만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절박했다. 조국이 없는 민족만큼 비참한 것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국을 잃고 온 세상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지만 결국은 1948년에 이스라엘을 건국했고, 미국뿐 아니라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 유태인들에게서 나온다. 처세는 유태인에게서 배워야 한다.”

유태인들의 나라사랑을 늘 강조하며 그들의 지혜서인 탈무드를 자주 언급하셨다. 조국을 잃고 세계로 흩어져 버린 유태인들은 ‘걸어 다니는 조국’ 인 탈무드를 통해 그들의 민족과 종교의 정체성을 이어갔다.

“우리 민족에게도 그런 힘이 필요하다. 지금은 조국을 잃어버렸지만 반드시 조국을 찾아야 한다.”

한국인의 설움을 체험하신 아버님은 상해 임시정부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여러모로 도왔다. 아버님 역시 자랑스러운 인삼 무역업자로서 번 돈을 독립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독립을 위해 썼다. 아버님의 애국애족 정신을 높이 산 김구 주석은 임정의 각료로 추천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저는 사업가이지 정치가가 아닙니다.”

김구 주석이 답례로 직접 쓴 휘호 ‘무역구국(貿易救國)’을 하사한 이유도 아버님을 신뢰했고, 조국 독립에 대한 소명의식을 나눌 동지로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실업가인 아버님은 ‘총대 없는 상인 독립군’ 인지라 앞에 나설 수 없어,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창설된 광복군에게 군복과 무기 등 군수물자를 제공하는데 힘을 보됐다.
 
▲ 거실에 걸린 무역 구국 휘호

아버님은 늘 조국을 위한 보이지 않는 조력자가 되고 싶어 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성경 말씀처럼 살았다.

무역구국이란 휘호는 김구 주석께서 아버님께 전한 진심이 담긴 선물이며 우리에게 역사적인 중요한 가치를 지닌 현판이 되었다. 그 휘호는 아버님이 살아온 삶의 결정체이며 소명의식이었고, 임종하시기 전에 가훈이자 가보로 나에게 정신과 함께 유산으로 남기셨다.

그 시절 무역구국을 강조했던 김구 주석의 비전은 오늘날 한국이 세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던 원천이 되었다. 김구 주석이 보여준 독립에 대한 비전과 아버님의 결단력 있는 개척정신이 무역구국의 근본이념이라고 믿는다.

집에 걸려 있던 현판은 어린 시절부터 내 눈을 사로잡았다. 검은 먹물의 힘찬 획은 가슴에 용트림 치며 들어박혀 평생 내 삶을 좌우하는 피와 혼으로 작용했다. 김구 주석은 아버님을 통해 평생 걸어야 할 가르침을 주신 위대한 스승인 셈이다.

1919년 4월 11일 망명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상해는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역인 동시에 임시정부의 지명을 상징했다. 그곳은 국내와 가깝고 미국이나 유럽을 왕래하기 좋은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서구 열강의 조계지(租界地)가 있고 제국주의 상호 간 세력 균형 아래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각국의 외교기관이 주재지에 있어 국제여론 형성과 정보수집이 용이했다.

상해는 중국 혁명운동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곳으로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독립투쟁에서도 중심지가 되었다. 상해로 망명한 한국인들은 프랑스조계와 공동조계에 정착했으며, 국권 상실 이후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프랑스조계를 선호했고 임시정부도 여기에 두었다.

일제 역시 1910년 이전부터 상해 주재 총영사관을 통해 한인들에 대한 정찰과 한인들의 동태를 조사한 결과 장차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하여 1910년 이후 상해로 이주해온 한인이나 유학생은 일본 총영사관에 주소와 성명을 등록하도록 강요받았다.

나는 아버님에게 일본에 침략당한 한국의 현실에 대해서 들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위대한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얘기도 들었다.

프랑스 조계의 임정 청사는 국내외 독립운동의 지휘본부 구실을 했던 곳으로, 보경리(普慶里) 4호(현 盧灣區 馬當路)에 위치한 연립 주택형 3충 벽돌집이었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서 일본 지휘부를 폭사시킨 의거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상해를 떠나 중경까지 대장정의 길을 떠났다고 들었다.

국교가 수립되기 전인, 1990년경에 내가 임정 청사를 방문했을 때 어릴 때 본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만 세계를 돌아다녀서인지 어릴 때 본 모습보다는 규모가 작았고 초라했다. 중국인 관리실장이 사정을 말했다.

“청사가 대부분 한국 관광객들의 방문비와 성금으로 운영됩니다.”

우리 현대사에 중요한 유적지인 임시정부 청사가 소중히 보존되어야 후대에도 한국의 독립사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으리라.

약간의 자금을 기부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임정 청사를 방문한 지인의 사진을 통해 뜻하지 않게 나의 이름이 현판에 새겨진 것을 알게 되었다. 총리, 중진 국회의원 등 한국 사회 저명인사들의 명단 속에서 내 이름을 보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정 청사가 상해시의 시 예산 차원에서 관리되고 있을 뿐 한국정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은 재고할 문제로 다가왔다. 1993년 임정청사 기념관이 개관한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방문해서 성금을 내놓은 것 외에 정부가 한 일이 없었다. 한국 독립운동의 요람이자 성지인 임정 청사의 보존과 관리를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버님도 같은 의견을 말씀하셨다.

“상해 임정 청사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 중국 정부를 상대로 한국정부와 한국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너의 기부는 잘한 일이다. 자랑스럽구나.”

 
  상해 뒷골목의 개구쟁이 (3회)
  해방, 그리고 국민당정권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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