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상해 적사위로 사위리 12호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을 전후하여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다.
그 시대를 산 사람에게는 유소년 시절에 전쟁이 암울한 그림자로 드리워 있다. 즉, 그 시대를 이해하자면 전쟁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개인의 삶은 시대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세대는 전쟁을 두 번 겪으며 피폐해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나와 어머니, 여동생의 생명을 위협했던 중일전쟁은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이 1937년 노구교(盧溝橋) 사건을 핑계로 삼아 일으켰다. 일본군은 해안도시를 장악하려고 양자강 지류의 가장 큰 두 도시, 상해와 남경을 침공해 대학살을 자행했다. 승승장구하던 초전(初戰)과 달리 수도를 중경으로 이전해 내륙으로 거점을 옮긴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전쟁은 고착화되어갔다.
한편 미 공군은 중국 전선을 지원하며 일본군에 대한 제공권을 확보해 나갔다. 전쟁의 거점 도시, 양자강의 하류에 위치한 상해항은 1842년 아편전쟁으로 체결한 남경 조약(南京條約)에 의거해 서구 열강이 개항시키며 조계지를 설치했다. 이후 상해 조계는 중국의 치외법권 지대가 되어 서구 열강들이 앞 다투어 동아시아에 진출하는 교두보로 삼았다.
1940년대까지도 상해는 국제 무역과 상업의 중심으로 “동양의 파리( Paris of the East)”, “동양의 여왕(Queen of the Orient)"이란 별칭을 얻으며 동아시아에서 가장 번성한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된 것도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상해, 특히 조계지에는 중국인, 한국인들도 많이 살았다. 한국인들 가운데는 독립 운동가들이 많이 살았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집들도 많았지만 밀정이나 반역자도 많았을 것이다.
어린 시절，할아버지와 아버님의 체질을 물려받았는지, 나는 활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리는 개구쟁이였다. 이웃에 사는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중생 씨의 아이들과 자주 놀곤 했는데 하마터면 큰 사건이 날 뻔한 일이 생겼다.
무덥고 비가 많이 오면 먹을거리가 부족한 벌들이 도시의 주택가에도 나타나 집을 짓는다. 그때 커다란 벌집이 동네에 생겼는데, 호기심으로 안중생 씨의 아들과 막대기를 가져가서 쿡쿡 쑤셔 보았다.
순간 새카맣게 주위를 뒤덮는 벌떼가 침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우리 두 사람은 막대기도 집어던진 채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개구쟁이들의 장난으로 치부해도 될 일이었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항의를 하는 통에 아주 된통 곤욕을 치렀다. 벌집 사건은 그걸로 끝나지 않고 독립운동 관련 집안으로 문제가 확대 되어 아주 곤란을 겪었다.
개구쟁이 어린 시절을 더듬어 보면 전주 김 씨인 할아버님(講 觀敎:1886~1967)은 평양 출생이었다. 당시에 육순(六旬)이 넘으셨는데도 기골이 장대하고 호방한 성격으로 다양한 취미를 가진 활동적인 분이었다. 내게 중국 장기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낚시도 즐기셨다. 넘실거 리는 황포강으로 민물장어 낚시를 가시면 나를 데려가시기도 했다. 나는 할아버님 곁에서 강을 따라 크고 작은 기선이 드나들고 정크선의 누런 돛이 바람에 부풀어 지나가는 풍경을 지켜보곤 했다. 장어를 낚으시면 할아버님은 미끄러운 고기인지라 머리에 못을 박고 바로 손질하셨다.
할머님(講 김희교:1891~-1965)은 신심이 깊은 분으로,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시기도 했다. 손자를 동화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던 분이기도 하다.
아버님(講 昌華:1909~1988)도 할아버님처럼 평양에서 출생하셨다. 서북의 평양은 기독교와 근대교육의 영향으로 개방적인 성격을 갖춘 지역이었다. 평양고보를 나오고 유학을 하신 아버님은 세상에 대한 시야가 열린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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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모님의 결혼사진 / 신랑 김창화 신부 박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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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고보를 졸업하신 후 일본 유학을 떠나 일본 동경 체육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동경 법정대학 상과에 들어가 2년간 공부를 하시고는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평양에 돌아오신 후 이내 결혼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상해로 이주하셨다.
상해로 이주하신 할아버님과 아버님은 곧장 무역에 뛰어드시고 1928년 10월 상해에서 금화공사(金華公司)를 창립해 자영했다.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을 중국에 판매하는 무역업에 종사해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셨다.
아버님의 경영마인드는 훗날 무역구국(貿易救國)의 휘호를 백범(白凡) 주석으로부터 받게 되면서 더욱 견고해졌다. 어린 시절 우리집은 38년형 쉐비 컨버터와 인력거를 갖추고 있을 만큼 부유한 환경이었다.
어머님(박경호:1910~1994)은 신여성으로 평양고보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재원이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음악적 재능을 나의 두 살 아래 여동생(김영숙)이 물려받아서인지 나중에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했다.
부모님들의 개화된 의식은 그대로 가풍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 서울에서 생활할 때 우리 집을 방문하는 친구들을 통해 ‘서구식’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어머님은 음식도 서구식으로 대접했기에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것도 부모님의 열린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