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7회)
  제2장 해방 이후의 한국

내가 살아온 시절은 왕조와 식민지를 거쳐 새롭게 태어난 대한민국의 거대한 현대사가 토대를 놓던 시대였다. 그만큼 혼란과 시행착오도 많았다. 한국 현대사 초창기를 구성했던 그 시대 국제정세의 결과로 광복의 기쁨을 누릴 사이도 없이,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을 맞이했다.

분수령을 맞는 시대에는 비전 있는 지도력이 한 민족 미래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기에 그만큼 책임감 있는 지도자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과거사를 다시 조명해 보면서, 당시에는 그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그들은 진정 민족을 사랑하며, 미래의 비전을 보면서 결단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나 스스로도 반성하게 된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살아온 개개인의 역사가 결코 개인사로만 한정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면 그 역사에 대한 공동운명체이자 연대 책임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사상가 고염무(顧炎武)도 “천하흥망(天下興亡)은 필부유책(匹夫有責)”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그 시대를 살면서 나의 후손들에게 떳떳한 미래를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가?’ 라는 물음에 가슴에 손을 얹게 된다.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다. 해방 후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데올로기가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역사적으로 1945년 7월 26일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과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모여 가진 ‘포츠담 회담’ 에서 일본의 항복 권고와 전후 한반도의 운명이 달린 전후 일본에 대한 처리문제가 논의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삼상회의(12월 16일)에서 미 · 소 · 영 · 중 4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제안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미 군정하에서의 조국은 그야말로 혼선 그 자체였다.

김구 선생은 해방된 조국 앞에 내민 청사진으로 ‘통일정부론’을 견지했다. 1948년 2월 10일「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吿)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이승만 박사의 단독정부론’을 비판했고 두 지도자 간의 이견은 대립양상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1948년 1월 17일 입국하면서 이승만 박사 쪽으로 운명의 추는 기울어져 갔다. 김구 선생은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을 감행했다. 방북에 앞선 4월 15일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깨끗이 조국 통일 독립에 바치려는 것이 금차(今次)북행을 결정한 목적이다.”

민족의 큰 지도자로서 김구 선생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어쩌면 선생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지도 몰랐다. 후대에 글을 읽는 우리들이 진심 어린 공감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닥쳐오는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문제 처리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 간의 갈등은 결국 분단으로 귀결되었다. 유엔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북한 지역을 제외한 남한에서 총선거가 치러져 제헌국회가 출범했다. 이로써 반만년 역사 속에 부끄러운 식민지 시절인 1919년 4월 11일, 태어난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분단시대의 명사가 되었다. 후일 통일이 되어 국호가 바뀐다면 대한민국 시대를 산 우리는 치욕의 분단시대에 연대책임을 져야 하는 국민인 것이다.
 
▲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는 김구 일행(1948.4)

총선거를 거쳐 광복 3주년이 되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제헌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국회의장이 선출되었다. 이 헌정사가 바로 분단 역사의 첫 단추로 끼워져 우리에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나름대로 약술해본 해방 이후의 헌정사는 역사 교과서에서도 접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나의 뇌리 속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평양이 고향인 할아버님과 아버님으로부터 들었던 얘기였다. 그분들의 걱정과 탄식에서 나는 역사를 읽을 수 있었다.

“나라가 둘로 갈라지겠구나.”
“앞으로 고향에는 갈 수 있을까요”

통일된 조국을 염원하셨지만 결국 차마 말로써 꺼내지도 못한 채, 분단된 땅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운명에 대한 직감이었을 것이다. 우려는 결국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아버님이 그런 분단 미래를 걱정하게 된 사건은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이었다. 평생 대한민국의 문지기를 자처하며 한 번도 정부를 떠나지 않았던 김구 선생의 저격은 한민족에게는 비극이었다. 정파투쟁의 결과로 위대한 민족 지도자를 잃고 만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 국민장(國民葬)은 1949년 7월 5일에 거행되었다. 운구행렬이 경교장(京橋莊)을 떠나 영결식장인 서울운동장까지 가는데 애도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경교장으로 조문을 다녀왔던 아버님은 몹시 애통해하셨다.
 
“민족의 큰 별이 졌다!”

이승만정권의 자유당시대는 거칠 것 없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백범 선생이 없는 정치 무대에 이승만의 자유당은 눈치 볼 사람도, 세력도 없는 폭주기관차였다.

한국 현대사에서 백범 김구 선생은 민중들에게는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고 조국 통일을 염원했던 '민족의 아버지’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국가권력이 나서서 김구 선생의 존재를 제대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상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유는 민중이 애써 그를 기억하고자 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민중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를 암살하고 정권의 비호 속에 지내온 안두희를 응징했던 것이다.

김구 선생의 민족 통일에 대한 염원대로 한국 현대사가 진행되었다면 고착화된 분단국가로서의 슬픈 자화상을 갖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야기된 한국전쟁, 그리고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4·19의거, 5·16으로 점철된 역사적 파행 속에서 실향민들의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져버렸다.

남북한 이산가족의 눈물겨운 상봉은 해방 50년이 지나서 200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 평양을 지척에 두고도 고향을 갈 수 없었던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심경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그분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런 연유로 인해 오랜 세월 가슴에 담아둔 채 타계하신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대신해서 나는 2001년 북한을 방문했다. 김구 선생의 서거는 해바라기 성향을 지닌 일부를 제외하고 임시정부계열, 중국계열의 몰락과 퇴조를 의미하기도 했다.

아버님은 서울역 앞 대우빌딩 자리에 금화무역(金華企業株式會社)을 차렸다. 그리고 미 군정으로부터 땅을 불하받아 남대문 로터리 주변으로 상가를 지어 임대했다. 하지만 정부 당국으로부터 남대문 일대가 도시 미관상 보기 흉하다는 이유로 허물고 다시 지으라는 노골적인 압박을 받았다. 아버님은 당국의 의도적인 견제를 인식하고 상가 운영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렸다.

아버님은 정치가는 아니지만, 사업에는 상도(商道)가 있고, 정치에도 정도(政道)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셨다. 정치가 청류는커녕 이미 혼탁함도 정도를 넘어 탁류(獨流)가 되어가고 있다고 개탄하셨다. 거세계탁(擧世皆獨)의 현대사회는 그때부터였다.

그 시절 혼탁한 시대의 갈등들이 노출되면서 결국은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귀국 그리고 학교생활 (6회)
  전쟁과 죽음 (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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