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파도가 일렁거리며 사정없이 눈앞으로 밀어닥쳤다. 또 한 번 몸이 휘청거렸다. 먹은 것이 없는 뱃속에서 맑고 쓴 물만 입을 통해 솟구쳤다. 몸은 힘이 다 빠졌고 눈물이 흘렀다.
‘이대로 죽는 건 아닐까?’
매일 사람이 죽었다. 그곳은 숫제 움직이는 지옥과 마찬가지였다. 악취가 나는 시체는 배에서 바다로 던져져 떠내려가며 가라앉았다. 풍랑이 일자, 배는 쉼 없이 요동쳤다. 부모들의 한숨과 함께 또 어린 아이의 시신이 바다에 던져져 노도에 휩쓸려 고기밥이 되어 버렸다.
구토가 올라와 나는 엎드려 토했다. 어지러움에 배가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나도 바다에 던져진 어린애 같은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구토와 설사를 되풀이하자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멀고 먼 뱃길이었다.
배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숨 쉴 틈도 없었고 악취가 코를 마비시켰다. 갇힌 채 뱃멀미에 시달리면서 지내야만 했다. 중국 각지에서 남경과 상해에 집합한 군인, 교포 둥 1천여 명이 희망을 가득 품고 미군 수송선 (LST) 맨 밑바닥 선창부터 갑판까지 들어차 고국을 향한 힘겨운 항해를 견디고 있었다. 배에는 선량한 귀국민은 물론 혁명가, 군인, 모험가와 투기꾼, 친일파까지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심한 욕지기와 구토 설사를 겪으며 조국의 땅을 밟기도 전에 죽을 것 같은 상태였다가 차츰 뱃멀미에 익숙해지며 기운을 회복해갔다. 사람 숲을 헤치고 간신히 갑판에 나와서 난간에 기대어 망망대해를 바라보면 조국으로 간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 사뭇 설레기도 했다.
조국이란 가보지 못한 땅이지만 아버지로부터 귀가 닳도록 돌아가야 할 곳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국은 무조건 내가 돌아가야 할 목적지였다. 한국인으로서 이국땅에서 겪던 남모를 차별도 이제는 내 땅으로 간다는 희망 때문에 금세 잊어버리게 되었다. 선상에서의 나날도 더 이상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간 머리를 감지 못한데다, 사람들 사이에서 옮겨온 이가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쉴 새 없이 물어대는 벼룩 때문에 온몸이 벌겋게 되도록 밤새 벅벅 긁어대곤 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악몽처럼 진저리 나는 길이었다.
마침내 배는 인천 부두에 도착했다. 미군 통역관은 하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짓가랑이를 고무줄로 묶게 하고서는 일렬로 세웠다. 그러자 미군들이 분무기를 펌프질하면서 소독약을 머리부터 온몸에 뿌렸다. DDT였다. 하얀 분말이 공기 중에 퍼졌고, 냄새가 어찌나 독하던지 재채기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약을 맞은 이후 서캐나 벼룩 따위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 것은 다행이었다.
우리보다 나중에 귀국한 사람들은 아예 상륙을 미루고 검역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6년에는 중국에서 귀환하던 동포에 의해 배 안에서 콜레라가 퍼져 그해 여름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전 국민을 공포에 빠트렸다. 특히 경북 일대에 2천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전염을 막으려고 대구를 봉쇄했다. 농산품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쌀이 부족해져 대구 10·1 사태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용산구 갈월동 7의 18번지에 정착했다. 집에서 남산 쪽으로 골목길을 걸으면 10분도 안 걸리는 후암동 190-2번지에 삼광국민학교가 있었다. 나는 그 학교로 전학했다. 1919년 4월 삼판 심상소학교라는 일본인 학교로 개교했지만 광복을 맞은 지 한 달 후인 1945년 9월 22일에 학교를 인수해 그해 11월 1일에 개교했다.
일본인 학교였던 탓에 당시로서는 제일 큰 학교였고, 과학실에는 다양한 실험기구가 비치되어 있었다. 특이하게 수영장도 갖추어져 있었다. 교정에는 아주 큰 등나무가 그늘을 짓고 해마다 5월이면 보랏빛으로 꽃이 피어나 짙은 향기를 풍겼다.
이웃에 사는 친구들 중에 모니카 유(유주영)와 친하게 지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물리학자였고, 어머니가 독일계 여성이었다. 반 아이들은 그를 “트기” 라고 짓궂게 놀려대곤 했다. 하지만 나는 상해에서 서구학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조금도 그들이 나와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 남매 역시 차별하지 않는 나를 좋아해서 친하게 지냈는데 놀림을 당하는 광경을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얼굴이 서구적이고, 피부가 약간 희다는 것 말고는 한국인과 다름없는데도 몇 아이들이 괜히 시비를 걸곤 해서 한번은 나서서 말렸다.
“놀리지 마라! 그런 못난 짓을 하니까 일본 놈들한테 당하고 살았잖아?”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가장 덩치 큰 녀석에게 물었다.
“너희들 왜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겼다고 생각해?”
녀석은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주위에 선 아이들도 눈만 껌뻑거렸다.
해방된 기쁨만 알았지 왜 나라를 빼앗겼는지는 아무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또 국내에서 일본인 치하에 살며 그것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어린이들이었던 것이다. 나 역시 나라를 잃은 원인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상해가 일찍부터 발전한 것이 바로 조계 때문이라고 들었다. 아버님은 대국이 되려면 국가가 문을 열어야 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한국은 작은 나라가 아니고 좁은 나라다. 속이 좁아서는 결코 큰일을 할 수가 없다. 큰마음을 가지려면 마음을 열어야 한다.”
큰일을 하고 싶은 치기에 일부러 대담한 훈련을 하느라 모니카 유 남매를 동정한 것은 아니었다. 조계에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지낸 결과 인종이나 국적에 얽매이는 것이 버릇이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모니카 유는 I960년대 초반 대 히트곡인 블루스 곡 「서울에서 동경에서」를 비롯해 「라모나」, 「남의속도 모르고」 같은 팝이나 번안가요, 재즈음악을 국내에 소개하며 젊은 충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미모의 가수, 패션모델로 성장했다. 남동생 유주용 역시 잘생긴 외모로 영화에도 출연했고 팝음악을 부르는 가수가 되었다.
학교생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음악 시간이었다. 담임이셨던 조동규 음악선생님은 시대를 앞선 분이었다. 교실에 늘 서구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으셨고, 합주부를 조직해 학생들의 음악적 재능을 깨워주셨다.
동급생으로 전 과기처장관 정근모가 기억이 난다. 학교가 있던 후암동을 비롯한 남산 밑의 일본 동네는 월남민, 특히 서북지역 출신자들이 많이 자리를 잡았다.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앞집에 살았고, 황성수 국회부의장도 이웃에 살았다.
아버님은 서울에 정착한 후 대동산업주식회사(大同産業株式會社) 전무 취체 역(전무이사)을 맡으셨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부동산 개발회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동시에 금화기업주식회사(金華企業株式會社)를 설립해 중국에서 하던 인삼 무역업을 그대로 계속하셨다.
그 무렵의 친분 있던 인사로는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씨가 있다. 연세가 비슷하고 같은 평안도 출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