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공사를 사임한 나는 서울대 대학원, 연세대 공대, 한양대 공대에 나가 석유와 석유화학에 대한 강의를 했다. 실제적인 자료와 현장에서의 지식과 경험에 의한 이야깃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대학의 분위기는 그동안 동분서주하던 나에게 안온한 휴식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음에 할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유공에 들어갔을 때 일단 문을 닫았던, 전엔지니어링회사를 1971년 5월에 다시 발족시켰다. 나를 따라 석유공사에 들어갔던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엔지니어링 회사로 옮겨왔다.
당시 우리나라 엔지니어링 분야는 완전한 미개지였다. 1963년 정유공장을 세울 때에도 대부분 외국기술에 의존해야 했었고 예비조사, 기본설계, 기자재발주, 저장탱크 공사 같은 일도 모두 미국에 맡기는 형편이었다. 겨우 대한조선공사가 송유관 부설공사의 하청업자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만큼 우리의 기술 수준이 낮았고 인재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기술은 정유공장을 울산에 지으면서 현장에서 양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에 원유 3만 5,000 배럴을 처리하는 공장을 5만 배럴로 늘리는 제1차 확장공사는 우리 기술진이 해낸 것이다.
석유공사는 1966년 1월 증산시설공사에 대한 정부 승인을 받고 7월에 일본의 JGC(Japan Gasoline Company)와 건설계약을 체결했다. 이 공사는 7월 6일 착공하여 이듬해 5월 1일 완공되었다. 그때 우리 기술진은 탱크, 배관, 돌핀(Dolphin) 등의 부대시설을 설계, 감독하였으며 국내 건설업체가 시공에 가담했다. 이것은 당시 이 방면의 기술축적이 미약하던 상황에서는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이 경험을 살려 우리 기술진은 윤활유 배합공장 건설에도 참여하여 1968년 12월에는 일간 550배럴 생산규모의 공장을 완성해냈다. 이는 국내 기계공업 발달의 결정적인 촉진제가 되었다.
전엔지니어링 회사를 위해 미국대사관 뒤에 있는 빌딩에 사무실을 얻은 나는 이제 한국의 엔지니어링을 본격적으로 키워나갈 결심을 했다. 석유공사를 시작할 때 절감했던 엔지니어링 교육의 미비함을 보충하여 사업을 하면서 새로운 인재를 키워갈 생각이었다. 석유화학 사업을 하고 싶었지만, 자본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맨주먹에 머리만 있으면 되는 엔지니어링 사업에 뛰어든 것이었다.
내가 떠난 뒤의 석유공사는 운영권이 걸프오일로 넘어가면서 공장 조업과 기술은 또 다시 외국인 손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설계부의 인원이 대폭 감소되자 성정자 씨, 윤진만 씨, 민석홍 씨, 이홍수 씨, 이승무(李勝茂) 씨와 같은 중견 엔지니어들이 대거 우리 회사로 옮겨 왔다. 그들은 이제 어디 내놓아도 꿀릴 데 없는 당당한 엔지니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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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 대한석유공사 주주총회 / 박원석 사장을 중심으로 한국 측 주주인 정부 측 인사와 걸프오일 측 인사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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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공사와 같이 화려한 직장을 떠나 다시 무에서 시작하는 나를 따라 와준 그들은 누구보다도 우리나라 공업기술 발전을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공업화가 한참 진행되던 한국에서 기술 중심의 우리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있었다.
회사의 조직은 사장 전민제, 부사장에 이근우(李根雨), 남기동(南基凍), 김동희 씨, 상무에 윤진만 씨, 민석홍 씨로 되어 있었고, 성정자 씨는 남편 최종완 씨가 강원도 도지사로 임명된 관계로 일시 강원도에 가 있다 돌아온 뒤에 상무가 되었다.
그 외에도 나는 당시 출강하던 한양대에서 김태원(金太原) 군을 먼저 선발한데 이어 4명의 학생 강호근(姜好根), 김기윤, 이덕생(李德生), 장문택(張文澤) 군 등을 발탁했다. 그들은 여름방학 동안에 실습하러 나왔다.
성정자 씨는 나의 지시로 그들에게 1만 배럴을 정유할 수 있는 공장을 설계하라고 지시하면서 <이란의 원유(Iranian Crude Oil)>이라는 보고서와 넬슨의 <정유편람(Refinery Handbook)>을 참고서로 내주었다. 그들의 작업결과를 브리핑으로 들어보니 앞으로 엔지니어로 자라날 가능성이 있어 보여 그대로 채용하기로 했다. 그밖에 한양대 기계과 교수들의 추천으로 오박균, 이재욱, 고병호, 이영남(李英男), 김성일(金成一) 군 등을 입사시켰다.
새 회사가 발족하던 1971년 당시 한국회사가 외국에서 일을 따서 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나는 이러한 미개척지에 뛰어들어 외국에서 일을 따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려니와 보람 있는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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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 대한석유공사 부사장 직을 사임한 후 부부동반 세계일주 여행길에 방문한 싱가포르에서 / 걸프오일 아시아 지사장인 허브 굿맨 씨가 내게 그림을 기념품으로 선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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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선 1971년 초에 UOP와 정유 및 석유화학 공장에 관한 기술제휴를 맺어서 석유화학 공장에 관한 특허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개인회사가 외국회사와 기술 제휴를 한 첫 케이스였다. 전엔지어링(Chon Engineering Company)은 여러 개의 기초화학공장을 설계, 건설하여 한국의 화학공업에 원료를 제공할 수 있는 길을 개척했다.
나의 모델은 UOP(Universal Oil Products)였다. UOP는 1914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발명가 제씨 A. 덥스(Jesse A. Dubbs)와 시카고의 자본가 J. 옥텐 아머(J. Ogden Armour)에 의해 창건되었다. 내셔널 하이드로카본 회사(National Hydrocarbon Company)로 출발한 이 회사는 1년 후 Universal Oil Products로 이름 바꾸고 4년 후엔 염분해 공정(Thermal Cracking Process)을 창안해냈다. 이 방법은 현대 정유산업의 기초가 되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UOP는 그 후에도 계속 공정기술, 장치설계 방면에 큰 기여를 했으며 그들의 기술은 전 세계의 기업들이 이용하게 되었다.
전엔지니어링은 회사라기보다 학교와 같은 양상이었다. 성정자 씨, 윤진만 씨와 같은 선배사원들은 후배사원들을 위해 화공설계, 배관설계, 장치설계를 가르쳤다. 일부 유공의 엔지니어들도 퇴근 후에 와서 전엔지니어링 직원들에게 공정공학이나 배관설계에 대한 강의를 해주었다.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정신은 나라의 장래를 위한 큰 포부와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긍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정부의 위촉을 받아 창원기계공업단지를 위한 설계를 비롯하여 중동지방에서 발동하기 시작한 공업화를 위한 기간시설 설계 및 건설을 맡아 하는 한편, 기존공장 확장, 신설공장 건설을 곳곳에서 맡아 완성했다. 그리고 해수처리공장, 군대기지, 기업체 사무실, 주거용 아파트, 공업용 창고, 학교, 병원 등을 세워나갔다.
전엔지니어링이 일을 할 수 있는 분야는 석유, 석유화학, 비료, 화학약품, 플라스틱, 수지(樹脂), 공업용 가스, 각종 금속, 펄프와 종이, 오염방지의 환경보호, 에너지 보존, 담수화, 공업용 처리, 공업도시 설계 등 다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