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이래 첫 정권교체 (88회)
  제12장 정권교체와 국민의 정부에서

10월경부터 여론조사에서 DJ 지지도가 30%를 넘게 나타났다. 후보자들 가운데 1위라는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과연 표로 연결이 될지는 의문이었다. 그이는 다녀보니 이번에는 DJ가 당선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했다. 김천의 그이 지지자들 가운데는 “박 의원에게 도움이 된다면 DJ를 지지하겠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너무나 고마웠다. 고향사람들이 진정으로 그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소박한 말이었다.

중국대사관 리셉션에서 만난 백선엽 장군이 “남북통합 이전에 동서화합도 필요하겠지”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그이가 야당으로 이적한 것을 의식하신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김운용 체육회 회장도 DJ에 대한 호감을 나타내는 말을 했다.  

97년 10월 22일에 그이가 부총재로써 DJ총재 대신 국회에서 대표연설을 하게 되었다. 일주일 전에 당 정책실에서 초안을 넘겨받고 그이가 손질을 했다. 나는 남편에게 “야당의 상투적인 과격한 용어대신에 격조 높은 논조의 연설이 되었으면 한다”는 주문을 했다. 그이는 매일 밤 서재에 앉아서 다시 쓰고 또 쓰고 해서 최종 연설문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아들 내외와 같이 의사당 방청석에서 남편의 연설을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 받기에 바빴다. 그의 동기 가운데는 현병무 씨가 제일 먼저 축하 전화를 해주었다. 그리고 주로 김천 유권자들의 전화였다. “DJ가 김천에 수백 번 다녀간 것 보다 몇 백배 더 효과 있는 연설이었다”며 자기들 일같이 기뻐들 했다. 어느 강남 주부는 전화를 하고 “가슴이 뭉클했다”는 말을 해주었고 가락시장에서 20여명이 황홀하게 들었다는 격려 전화도 받았다. 그런가 하면 “평생 깨끗이 살아온 분이 왜 하필이면 신의 없는 DJ 밑으로 갔느냐”며 역정을 내기도 했다.

국회에서 대표연설이 끝난 후 DJ가 직접 그이 사무실로 “잘 했다”는 전화를 걸어주었다. 마침 대표연설이 있던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저서출판 기념행사가 있어서 참석했다. 그 자리에는 DJ, JP, TJ(세분이 모두 70대라고 해서 777이라고도 불렀다.)  모두 참석했는데 DJ가 축사하는 장면을 보면서 정치가 과연 무엇인지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박 정권과는 치열한 적대관계였고 실제로 핍박을 받았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축사를 하면서 박통의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식을 마치고 나를 본 DJ는 “박 부총재가 대표연설을 너무 잘 해서 후보교체론이 나오면 어떻게 하죠?”라며 기분 좋은 음성으로 농담을 했다. 남편의 연설이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나도 안심이 되었다.

11월로 접어들면서 신한국당은 민주당과 합당해서 한나라 당으로 개명하고 대구 의원들은 줄줄이 한나라 당으로 입당했다. 조순 전 총리는 이회창 후보와 단일화 선언을 하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선거결과를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회창 후보는 자기를 길러준 YS를 맹렬히 비판했고 조순 후보는 자기를 길러준 DJ의 반대파가 되어있었다.

한나라당이 지역구 위원장들에게 주는 실탄은 1000만원씩이고 국민회의는 겨우 200만원이었다. 그이가 박준규 전 국회의장과 같이 김천으로 유세를 간다고 했을 때 격세지감이 들었다. 78년 총선에서 박 의장이 매부인 백남억 후보를 지원하기위해 김천으로 와서 무소속인 그이를 비난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두 사람이 나란히 같은 대통령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을 하기위해 김천으로 간 것이다.

어느 날 그이는 대구 유세를 마치고 풀이 죽어서 돌아왔다. 대구에서는 죽어도 DJ를 못 찍겠다고 하니 큰일이라는 것이다. DJ를 반대하는 이유를 대라고 하니까 ‘믿을 수가 없다’ ‘DJ가 당선되면 경상도는 죽는다’고 해서 왜 죽느냐고 물으니 ‘빨갱이 나라가 되니까’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편은 “신의 뜻이 있으면 당선되겠지만 TK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장벽이 너무 높다”고 말했다.

그런데 12월 초 그이와 같이 입당했고 서울에서 유세한 길승흠 전 서울대 정치학교수가 “대세가 우리 쪽으로 기우니 당선직후에 내놓을 정책구상을 하자”는 팩스를 보냈다. KBS에 다니는 나의 제자 지연옥과 아나운서로 있는 조카가  KBS에는 DJ 지지자가 많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귀띔해 주었다.  강현중 변호사 내외도 시간이 흐르면서 당선확률이 높아진다고 전망했다.

드디어 12월 18일 선거에서 DJ후보가 2등과 1.6%차이인 40.3%의 지지로 당선됨으로써 50년 대한민국 헌정사에 첫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대구에서는 12.5%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지만. 우리 집에는 축하전화 받기에 바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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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가 있은 지 이틀 뒤 21일 새벽 시어머님이 96년간의 생애를 마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선거운동 때문에 대구에서 거의 시간을 보내느라고 자주 병원에 가보지도 못한 그이는 아들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데 대해 무척 가슴 아파했다. 미국에 따님과 아드님이 네 분이나 계시지만 서울에는 우리뿐이었다. 1년 2개월 전부터 노환으로 병원에 입, 퇴원을 거듭하시는 동안 넷째 며느리인 나 혼자서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제대로 잘 해드리지 못한 것 같아 후회가 컸다.

19일 아침 DJ가 당선되었다고 하니까, 말도 없이 눈만 감고 계시던 어머님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셨다는 말을 간병인이 전해 주었다. 반 혼수 상태에서도 아들을 위해서는 DJ가 당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나보다. 선거기간에 운명하실까봐 조바심했는데 선거가 끝나고 결과까지 알고 돌아가시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어디 특별히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노환으로 서서히 꺼져 가신 것 같다. 다만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 가슴 양쪽에 통증을 호소해서 진통제 패치를 사용해야 했다. 워낙 남을 많이 배려하는 분이라 비록 나 혼자 모시기는 했어도 특별히 힘들게 하지는 않으셨다. 그렇지만 강의하랴, 논문 쓰랴, 선거운동하랴, 사회활동을 병행하자니 육체적으로 피곤할 때가 있었다.

그이는 늘 “당신은 외아들에게 시집왔다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돌봐드려야 한다” “혼자 뛰어다니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손자 며느리인 주영이가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이냐고 할 때면 “너는 내가 늙어서 병들면 나를 돌봐 줄 사람이니까 할머니는 내게 맡기고 걱정하지 말라”고 해주었다.

그렇게도 깔끔하신 어머님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커다란 기저귀를 채워드렸다. 그럴 때면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시던 모습, 목욕을 시켜 드릴 때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이 들어가는 나도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 무렵 텔레비전에서 한편의 감동적인 외화를 보았다. 미국가정은 한국과 달라서인지 아들이 연로한 아버지를 돌보며 목욕도 시켜주고 잠자리에 들게 해주는 눈물겨운 부자관계를 그렸다. 힘없고 늙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를 어려서 내가 목욕을 시켜주었는데 이젠 네가 나를 씻겨주는구나”라는 대사가 가슴에 와 닿았다. 아들이 침대에 아버지를 눕혀드린 후 주의를 주니까 “Yes, dad!"(알았어요, 아빠!) 하고 애기 같이 대답하는 장면도 감동적이었다. 어머님께서 생을 마치기전 14개월간의 간병경험 때문에 그 영화가 나를 감동시켰는지 모른다. 사람이 태어나서 그 부모가 씻겨주고 대소변 가려주며 키우면, 늙어서 자식들이 부모의 뒤를 치워 주는 것이 인생의 순환인가 보다.

미국에서 오는 형제들 때문에 4일장을 치렀다. 강원용 목사님께서 장례식을 맡아주셨다. 삼우제를 마치고 형제들은 모두 미국으로 떠난 후 나는 여기저기 신세진 곳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어머님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내가 죽으면 내 며느리는 내 유품정리가 보통일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에 집안 정리를 결심하게 되었다.

어머님이 크리스마스까지만 기다리셨더라도 우리 여섯 식구가 한번 같이 모이는 것인데…. 어머님의 죽음은 나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나의 마지막 가는 길은 어떤 모습일까 라는 두려움이 그때부터 나에게 붙어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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