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아들을 그이는 한국에서 자리 잡게 해주고 싶어 했다. 다행히 김영무 박사가 설립한, 한국에서는 제일 규모도 크고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김 ․ 장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어 우리 가족 모두가 기뻐했다. 며늘 아이는 학위논문 때문에 1년 더 미국에 머물다가 96년 5월 조지 워싱톤 대학에서 전산학 박사학위를 받고 8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네 식구가 모두 박사학위 소지자가 되었다.
우리 부부는 정치학, 아들은 법학, 며느리는 전산학이 전공이다. 아들 내외와 손자 세 식구를 맞이하게 되어 모처럼 집안이 꽉 찬 분위기를 맛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 달간 작은 아파트에서 복작거리다가 아이들이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어 시원섭섭했다.
그이가 용하게도 덕성여대가 전산학과 교수를 충원한다는 정보를 얻어왔다. 그래서 며늘아이는 귀국 전에 그 대학교 전산학과에 제출해야 할 서류들을 DHL로 보내왔다. 내가 중간에서 심부름을 한 덕분에 며늘아이는 여름에 귀국하자마자 면접과 시강을 거쳐 가을학기부터 출강을 하게 되었다. 며늘아이는 요즘 말대로 하늘의 별이 아니라 하늘의 해를 따게 된 행운아가 된 케이스였다.
한 집에서 살지는 않아도 같은 아파트여서 국민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는 손자 태섭이는 우리 집에 놀러오곤 했다. ‘손자 재미’라는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 그이도 15대 전국구 의원으로 자리 잡은 후이므로 지역구 시절보다는 비교적 여유가 있게 되어 손자 재미를 즐기게 되었다.
미국에 살 때 며늘아이가 의도적으로 한국말을 썼기 때문인지 태섭이는 영어와 한국어를 곧잘 구사했다. 물론 영어를 더 편하게 쓰는 편이어서 집에서 가까운 중앙대학교 부속국민학교 2학년으로 편입한 후 아이들이 자기를 ‘미국아이’라고 놀려서 곤혹스러워 했다.
아들네 세 식구를 시아버님 산소가 있는 기독교 공원묘지로 데리고 갔다. 돌아오는 길에 통일전망대 부근에서 태섭이에게 임진강 넘어 북녘 땅을 가리키며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고향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 주변에 지저분한 종이들이 버려진 것을 본 태섭이는 “Koreans do not know how to love the nature?" "Let's clean this area together"(한국사람들은 자연을 사랑할줄 모르나요? 다 같이 청소해요)라고 하는 것이다. 대충 주워서 비닐봉투에 넣었지만 미국에서는 어려서부터 자연보호 교육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오후 태섭이에게 전화를 걸고 무엇하고 있느냐고 물으니까 “이범준 교수님댁에 가서 이야기하고 놀까 해요”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를 닮았는지 태섭이는 유머가 있고 가끔 엉뚱한 말을 해서 우리 식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한번은 “할머니, 나는 의사를 멀리하게 되었어요”라고 해서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니까 “아침에 사과 한 개를 먹었거든요”라는 것이다. 하루에 사과 한 개씩 먹으면 의사를 멀리 할 수 있다고 한 아빠 ․ 엄마의 말을 응용해서 한 말이었다.
자기 반에서 반장을 뽑는데 한 표차이로 떨어졌다고 하기에 “너도 네 이름을 쓸걸” 하고 놀렸더니 정색을 하고 “할머니, 만일 모두 다 자기 이름을 써낸다면 선거가 어떻게 되지요. 그러면 안 되는 거에요”라고 나무라듯 쳐다봐서 내가 오히려 멋쩍어진 적이 있었다. 그 외에도 태섭이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다. 8살짜리가 연속극을 보다가 야한 장면이 나오면 “저 사람 부인은 기분 나쁘겠다”고 해서 한바탕 웃은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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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가족 (아들 박성우, 며느리 이주영, 손자 박태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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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그랬듯이 며늘이도 직장에서 받은 첫 봉급 전액을 선물로 우리에게 갖고 왔다. 물론 그 돈은 다른 형태로 자기들에게 돌아갔지만 그 마음씨에 감동하고 속 깊은 자식들을 둔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 근 20년 동안 둘이서만 살다가 비록 한 집은 아니라도 세 식구가 우리 곁에 와서 살게 되면서 제법 사는 맛이 났다.
민주주의 국가는 국정의 반은 야당의 몫이며 야당총재는 정적이 아니라 정치파트너라고 나는 학생들에게 대학 강단에서 가르쳤다. “여야 간의 극한투쟁을 정당간의 정권교체를 한 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한국적인 현상”이라고 분석해 주었다. 정당간의 정권교체가 용이해지면 언제 입장이 뒤바뀔지 모르는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극한투쟁을 지양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다가 올 대통령선거로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긴장하며 지내야 했다. 여당에서 야당으로의 이적은 무서운 고뇌 속에서 내린 결단이었다. 또 수많은 주변 친지들과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규탄을 받아가면서 이룬 것이므로 반세기만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성사되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그이는 틈만 나면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을 갖고 대구와 경북지역에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주변에는 대부분이 이회창 후보 지지자들이었다. 그이나 나나 DJ 후보를 옹호하는 일이란 총선 때 경북에서 높은 지역감정의 벽에 부딫혔을 때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이 DJ가 비자금을 처조카를 통해 관리하고 있으며 평민당 시절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6억을 받았다고 폭로한 것이 대구 경북지역에서는 파문을 일으켰다.
대구의 유지인 조카 장인 말에 의하면 그동안 많이들 DJ에게 줄서더니 신한국당 폭로이후 다시 변해 10%만 받아도 많은 것이라고 전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부가 예산으로 낚시를 갔을 때 예산의 젊은 낚시꾼들은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문제 때문에 신한국당은 안 찍겠다고 했단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한편 YS 아들인 김현철 씨와 관련이 있던 박경식 비뇨기과 의사가 신문기고에서 ‘한국적 민주주의 하에서는 야당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될 일’이라고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