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제2의 고향 (13회)

시간이 갈수록 내 친구도 도저히 같이 못살겠다며 이혼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그때 내가 “만약 이혼하면 내가 너 매장시킨다.”며 협박을 했다. 결혼식장에 박인란을 데리고 들어간 사람이 나이니 내가 친정아버지나 다름이 없다는 논리로 적극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도 친구가 막무가내로 이혼을 고집해서 참다 못 한 나도 소리를 질렀다.

“너랑 결혼 안했으면 인란이는 피아니스트로 성공을 했을 거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갔으니 위자료로 집 한 채랑 피아노를 사주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을 줄 알아라.”

서슬퍼런 내 호통 때문인지 이혼 이야기는 점차 사그라 들었다.

나중에 시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박인란은 시아버지의 병수발을 다 들었다. 친구가 속을 썩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박인란은 아들과 딸을 낳고 키우며, 끝까지 가정을 지켰다.

내 친구 박영배는 중소기업체 부사장까지 오르는 등 승승장구 했지만 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찾아간 나에게 친구는 지난 일들을 돌아보며 많은 후회가 남는다는 말을 남겼다. 박인란은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반주를 맡는 등 그 후로도 자주 만났기에 살아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북한산 예술학교는 천재양성 고아원이었기에 박인란과 같은 실력이 뛰어난 아이들이 많았다, 이때의 아이들은 커서 KBS 교향악단에서 활동하거나 학교 강단에서 강의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다들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진정한 사랑과 교육을 받고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그 인생 또한 풍요로운 길을 걷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마운틴 얼몬드의 친구들도 오랫동안 인연이 이어졌다. 세월이 지나면서 여자 회원들은 점점 나오지 않게 되었지만, 남자회원들은 지금도 가끔 만나 지난날의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미아리 제2의 고향

미아리는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가난한 동네였다. 우리 집이 포천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 후 자리 잡은 미아리는 나의 고향이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는 곳이다.

미아리(미아동)는 강북구에 속한 법정동으로 뒤쪽으로는 북한산 국립공원이 있으며 서쪽은 산 능선을 경계로 성북구의 정릉동과 접해 있다. 또 북쪽은 수유동, 동쪽으로는 번동, 남쪽으로는 도봉로를 경계로 성북구의 길음동과 하월곡동을 마주한다.

미아리고개의 옛 지명은 먼 옛날 북방의 여진족이 넘나들었다 해서 붙여진 적유현(狄蝓峴)이었고, 토박이말로는 되너미고개라 불렀다. 미아동이라는 동명은 되너머고개를 미아리라고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과 미아7동에 미아사라는 절 이름을 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미아리에는 고개 너머 한국인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그래서 미아리고개를 넘어간다고 하면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비극을 뜻했다. 게다가 1956년 발표된 대중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알려지면서 한국전쟁 당시 미아리고개에서 남편과 이별해야 했던 한 여인의 한탄을 담은 가사내용으로 민족의 비극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 1959년 8월 미아리 동네 모습 / 대체로 낮은 기와집이다

한편 미아리는 1960년대부터 술집이 하나둘씩 생기면서 미아리 텍사스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무렵의 미아리 텍사스촌은 여자들이 있는 술집이지만 양은 냄비를 두드리면서 노래하는 허름한 술집 정도였다. 그러던 곳이 1970년대 이후부터는 청소년의 24시간 출입금지구역의 술집들이 들어서면서 하나의 구역으로 체계화되었다.

내가 살던 미아리는 현대사의 비극과 오랜 가난으로 점철된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내 믿음의 뿌리를 찾았다.

내가 살던 미아리에서 정릉교회 성경구락부를 가기 위해서는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곳에서 나를 친아들처럼 대해준 박순실 선생님은 나의 인격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주신 분이다. 그런데 박순실 선생님은 어린 내가 매번 고개를 넘어오는 것이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그 분은 내게 집 가까이에 있는 교회를 다니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집 가까이 있는 미아리 고개 너머 공동묘지가 보이는 길음동 골짜기에는 작은 교회가 있었다. 판잣집들 사이에 십자가가 우뚝 선 미아동감리교회(현 미아중앙교회)였다. 미아동 감리교회는 우리집과 꽤 가까웠다.

처음 미아동 감리교회를 찾아갔을 때 교회는 조그만 개인주택에서 예배를 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박경용 목사님과 김남이 사모님은 어린 나를 따뜻하게 환영해주었다.

첫 인상부터 좋았던 미아동 감리교회를 나는 그때부터 내 집 드나들 듯이 찾아갔다.

교회에서 만난 주일학교 친구들은 나를 적극적으로 교회에 다니게 만든 첫 번째 요인이었다. 주일학교 교사로는 유재건, 이길순, 오세희 선생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특히 이길순 선생은 토착적인 신앙인으로 남다른 가르침을 주었고, 여자인 오세희 선생님은 나중에 서울 신대를 졸업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나중에 국회의원을 지낸 유재건 선배는 우리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주일학교 반사를 맡았다. 나는 특히 유재건 선배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는 성경뿐 아니라 위인의 이야기도 들려주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아는 것이 많았다. 나는 유 선배가 들려주는 얘기에 매번 빠져들었다. 나는 그와 더 있고 싶어 주일학교 수업이 마친 뒤에도 뒷 정리를 함께 하며 조금이라도 같이 있으려 했다.

주일학교 유사 중 이병국 장로도 생각난다. 반공포로였던 그는 음성이 좋았고, 찬송가도 잘 불렀다. 성가대 지휘도 맡았던 그는 나중에 학생이었던 김인숙 작가와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했다.

미아동 감리교회는 내게 안식처와 같은 곳이었다. 절기마다 이야기가 있고, 배움이 있는 곳인데다가 성탄절이면 축제와도 같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교회에 흠뻑 빠져들어 새벽마다 새벽기도를 하기 위해 교회로 나갔다.

하지만 나의 이런 절실한 신앙생활과는 반대로 우리집에서는 교회에 나가는 것을 마뜩찮아 했다. 특히 아버지는 교회는 연애당이라며 교회에 가는 것을 아주 반대했다. 유교적인 집안이어서 더욱 더 그랬던 것 같다. 교회에 나간다고 매를 맞는 일도 빈번했다. 하지만 교회를 향한 나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