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를 뚫고 나오는 꽃 마운틴 얼...

나는 모임을 만들어 인연을 유지하곤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일목회다. 일목회는 서울에 있던 같은 학년의 뜻 맞는 고교친구들이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니면서 만든 모임이었다. 꽤 괜찮은 친구들이 모인 일목회는 사회적으로 이름난 사람들이 많았다.

일목회에서는 미국, 중국, 소련 대사를 초청해 특강을 청해 듣거나 우리나라의 지성인들을 강사로 초청하기도 했다. 일목회는 한 달에 한번 첫 번째 목요일에 만난다고 하여 일목회라 이름 붙였는데, 전체 인원이 26명 정도였다. 세월이 갈수록 인원은 점점 줄어들었고, 지금은 9명 정도가 모인다. 일목회는 나중에 발전적 해체를 하고, 마포포럼으로 남아있다.

중동고 학생회장인 이상진은 일목회를 통해 가끔 만나다가 내가 시청에서 근무할 때, 행정직 주사로 있는 바람에 시청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후에 청와대 국정상황실까지 갔던 그는 정치에 뜻이 있었다. 그의 바람대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마하였고, 그로 인해 상실감이 아주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중ㆍ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가슴 속에 품은 꿈이 있었다. 그것은 페스탈로치 같은 훌륭한 교육자가 되는 것이었다. 페스탈로치는 ‘왕좌에 있으나 초가(草家)에 있으나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신념으로 교육에 헌신한 교육자다.

페스탈로치는 농촌에서 생활하고 일하면서 어려운 사정에 있는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빈민학교를 세웠다. 또한 전쟁고아들을 돌보며 교육하기 위해 사랑과 헌신의 힘을 쏟았다.

페스탈로치의 삶을 알고 난후 나는 가슴이 뛰었다. 내 주변을 둘러보면 교육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이 많았다. 나는 이들을 위해 내가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고 궁리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동창인 이종웅을 만났다. 그는 휘문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나는 전도를 하여 이 친구를 내가 출석하던 미아감리교회에 다니게 했다. 같이 교회를 다니면서 나는 나의 꿈에 대해 이야기 했고, 친구는 내 뜻을 지지하며 함께 하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박순실 선생님을 통해 북한산에 있는 고아원의 원장을 소개받았다. 학생인 우리가 고아원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우선 클럽을 만들었다. 클럽의 이름은 바위를 뚫고 나오는 꽃을 뜻하는 ‘마운틴 얼몬드’라고 지었다.

마운틴 얼먼드 모임은 주로 교외학교에서 만났다. 이중웅 뿐만 아니라 내 뜻에 동참해주는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모임에 함께 했다. 그들은 휘문고, 덕수고, 창덕고, 성신고, 한양고 등 여러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거의 다 종로구에 있는 학교를 다니던 동창들이었다.

우리는 정릉에 있는 고아원인 북한산 예술학교를 찾아갔다. 박순실 선생님의 동창인 그곳 원장은 배화여고를 나온 분으로 고아원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다. 원장은 독특한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주 우리를 고아원으로 불러 독립이나 자주에 관한 문제에 대해 강의를 해주었다.

그 고아원은 4세에서 18세까지의 전쟁고아들이었는데, 원생들은 남녀 합쳐 7~80명 정도였다. 우리는 아직 한글을 떼지 못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쳤다.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우리는 점점 아이들과 많이 친해졌다. 나중에는 고아원 아이들 10명과 따로 클럽을 만들었다.

▲ 1961년 2월 수송전기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답사 / 뒤에 계신 분은 고백환 교장 선생님

그 클럽 모임에서 우리는 같이 음악도 듣고, 책도 나누면서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우리가 가져간 도시락을 함께 나눠 먹기도 하고, 각자 집에 데려가 집에서 재우기도 했다. 아이들은 스스럼 없이 나에게 형이나 오빠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이 고아원은 예술학교라 부를 만큼 음악에 특별한 재주를 가진 아이들이 많았다. 말하자면 음악천재들이었다. 예술학교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곳에는 피아노나 바이올린, 첼로 등 당시 보통 아이들이 접하기 어려운 악기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곡을 들으며 우리는 감동의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곤 했다.

시간이 흘러 이 아이들이 대학을 가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였다. 이들은 음악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공부는 부족한 아이들이 많았다. 대학을 들어가려면 음악 실기 뿐 아니라 일반 공부도 어느 정도 해야 하는데, 그걸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한양대를 설립한 김현준 총장이 북한산 예술학교의 아이들을 위해 결단을 해주었다. 실기만 보고 합격하면 입학을 허락해준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대학에; 다니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18세 이후가 되면 고아원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니, 각자도생하여 생활비를 벌어가며 학교를 다녀야 했던 것이다. 차비조차 없는 아이들은 정릉에서 한양대까지 걸어다녔다. 도시락을 쌀 여력도 없어 굶는 일이 허다했다.

나를 비롯해 마운틴 얼몬드 회원들이 이 아이들을 위해 도시락을 싸다주면서 응원을 해주었지만 점점 중도 포기하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게다가 실기 성적은 우수하지만 기초학력이 너무 부족해 대학수업을 따라잡지 못해 낙오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악착같은 노력으로 무사히 대학을 졸업한 아이들도 서너명 있었다.

그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이가 박인란이다. 나를 오빠라 부르며 잘 따르던 그 아이는 수도여자사범대(현 세종대)를 다녔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피아노 실력이 좋았다. 박인란의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된 미군인 뱀프리트 장군이 그 실력에 반해 양딸로 삼아 미국으로 데려가겠다고 할 정도였다.

박인란은 나중에 내 친구인 박영배와 결혼을 했는데, 그 결혼은 나와 도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내가 군에 입대했을 때의 일이다. 휴가를 나왔는데, 이 친구에게서 긴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이 친구가 나를 데려간 곳은 석굴암이라는 술집이었다. 당시 석굴암은 돈암초등학교 앞에 있어 나도 자주 가던 곳이었다. 동굴 속에 차린 술집인 석굴암은 여자는 출입이 되지 않고, 술도 2명 이상은 팔지 않던 독특한 곳이었다.

박영배는 글을 쓰던 친구였는데, 성격이 좀 낭만적이었다. 그는 내게 박인란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싶다며 내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박인란의 오빠로서 보호자였다.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진심이 보였다, 그런데 친구의 집에서는 박인란이 고아란 이유로 반대하고 있었다. 내 친구가 박인란의 방패가 되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집안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두 사람은 흔들리지 않았고, 마침내 결혼하였다. 물론 결혼하기 전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박영배의 어머니는 나를 반장이라 불렀는데, 결혼시키기 전까지도 내 손을 붙잡고, “반장, 우리 아들이 어디가 못나서, 저런 애랑 결혼을 해야 해?” 하고 하소연을 했다.

결혼식에는 보호자인 내가 아버지 대신으로 박인란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문제가 하나 둘씩 드러났다. 음악만 하느라 살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박인란은 갈수록 시부모에게 미움을 샀다. 가끔 그 집에 놀러 가면 친구어머니는 나에게 박인란이 살림도 못하는데다가 피아노만 친다며 흉을 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