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앞에 서서 (11회)

한 달 뒤 시험시간, 내 뒤에 앉은 김기수는 나에게 답안지를 보여 달라며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하는 수 없이 답안지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100개의 단어는 시험지 2장에 걸쳐 써야했는데, 김기수는 시험문제도 제대로 알지 못해 단어 50개가 적힌 1장만 베낀 뒤 제출해버렸다.

이 사실이 나중에 발각되었다. 김기수는 그 길로 도망가는 바람에 퇴학을 당했고, 내게는 정학처분이 내려졌다.

나는 훈육실에서 학교 뺏지를 떼고 서서 벌을 받았다. 유리창 너머로 아이들이 벌을 서는 나를 보고 수군거리며 지나갔다.

“너는 반장이라는 놈이 그런 짓을 해?”

훈육주임이 나를 무섭게 몰아세웠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훈육주임은 대위 출신이었다. 당시 학교에도 군부의 영향이 자못 강했다. 체육시간에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던 시절이었다. 무섭게 다그치는 훈육주임 앞에서 나는 얼굴만 붉히고 서 있는데, 담임선생님이 찾아왔다.

“주임 선생님, 성균이는 모범생인데,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수가 좀 별난 아이라서 그런 부탁을 들어준 모양이에요. 이번만 용서해주시면 제가 잘 이야기하겠습니다.”

담임선생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나는 다행히 정학처분을 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로 나는 아이들 사이에서 ‘의리 있는 놈’이 되었다. 김기수는 비록 퇴학을 당했지만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의리 있는 나를 졸업할 때까지 보호해주었다.

또 다른 일로 정학처분을 받게 된 적도 있었다. 문예부 부장을 하던 나는 국어선생님과 함께 신문인 <박동>을 만들고 있었다. 글을 쓰고 신문을 만드는 일은 나의 적성과 꽤 잘 맞았다.

그때 박동의 주간을 하신 국어선생님인 성원규 선생님은 우리에게 문학을 보는 눈을 깨우쳐주었다. 일례로 나물을 캐는 여자들을 소재로 시를 쓴다면 그 겉모습만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지 말라는 거였다. 그건 낭만적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나물을 캐러 나온 현실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진정성을 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런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과 학교 신문을 만드는 중에 일이 터졌다. <박동>에는 ‘자명고’;라는 꼭지가 있었다. 그곳에 내가 육성회비로 교실을 증축한다며 학교를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써서 발표했다. 그것을 본 교장선생님은 노발대발하셨다. 나를 빨갱이라면서 당장 퇴학을 시키려고 했다.

교장선생님은 초대 부총재를 지낸 장기영의 동기로 기세등등할 때였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학교 선배인 김인동이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다. 김인동 선배는 경희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다. 그는 고교 시절 학생회장(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이었는데, 웅병지도를 받기 위해 내가 찾아가면서 인연이 된 후로 나를 아껴주던 사람이었다.

그 선배가 어떻게 교장선생님을 설득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선배가 책임을 지겠다는 말은 생각난다. 그 덕분에 나는 퇴학처분을 면하고, 정학 3일을 받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일 때문에 나는 친구들에게 더 인기가 올랐다. 용기 있게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난 것이다.

1960년 내가 2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났다. 서울은 사대문 안팎의 거의 모든 고등학교가 시위에 참가했다. 우리 학교도 시위에 참여하여 나도 선배들을 따라 동기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 2000년대 초의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교문과 전경 (개포동 소재)

4.19혁명 당시 시위를 하다 희생당한 사람은 공식적으로 186명이다. 이중 대학생의 숫자는 22명이고, 고등학생이 36명,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19명이었다. 희생자 수로만 가늠할 수 없겠지만 4.19혁명의 주역은 고등학생이었다는 점은 역사가 평가하고 있다. 우리 학교에서도 희생자가 생겼는데, 장순용이라는 내 동기였다. 그의 이름은 4.19기념탑이 새겨져있다.

나는 3학년이 되면서 학생회장을 맡았다. 학교에는 학생들을 대표하는 직책으로 학생들의 투표로 뽑히는 학생회장과 학교 측에서 뽑는 대대장이 있었다. 평소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나는 학생회장으로 뽑혔다.

그 덕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전국 고등학교 학생회장이 모두 모인 곳에서 문교부장관의 일장 연설을 듣기도 했다. 해병대 대령출신이던 문희석 장관이 당시 교육부장관이었다. 5.16이 일어나고 군부세력이 교육계에도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학생회장으로서 사건에 연루되는 일도 있었다. 6월의 어느 날, 중동고등학교 학생들이 밤중에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내 이름을 불러대는 통에 대문 밖으로 나가니, 네 명의 아이들이 다짜고짜 나를 납치해 을지로에 있는 여관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나를 포함해 우리학교의 전작학생회장과 전, 현직 대대장, 그리고 중동고의 전, 현직 회장과 대대장들이 있었다. 얼굴을 보니 거의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와 중동고, 숙명여고의 학생회장단은 봉사단을 만들어 주로 학교 주위를 청소하는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 봉사단에서 얼굴을 보던 녀석들이었다.

거기 모인 인원은 모두 10여명 정도 되는 듯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짜고짜 중동고 아이들은 우리에게 종이를 내밀며 사인을 하라고 강요했다. 읽어보니 중동고와 우리 학교를 합치자는 내용이었다.

사인을 하라며 다그치는 중동고에 맞서 우리는 사인을 하지 말자며 서로 눈길을 주고 받았다.

“학교를 합친다는 것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내일 우리가 학교에 가서 상의해서 연락할 테니 기다려줘.”

한창 실랑이 끝에 결론이 나지 않고 분위기가 점차 심각해지자 결국 내가 나서서 말했다.

인문계인 중동고가 우리 학교와 합치려고 하는 이유는 운동장 때문이었다. 우리는 운동장이 있고, 중동고는 운동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동고 창설자는 최규동(초대 서울대 총장)이고 수송전기공고는 최규동 박사의 아우인 최우동 교장이 맡았다. 수송전기공고는 일본인이 세운 학교로 해장 후 최우동 교장이 인수한 학교이다. 말하자면 중동고와 수송전기공고는 형제학교인 셈이다.

다음날이 되자, 대대장고 나는 학교에 가자마자 훈육실 한응수 훈육주임선생님께 먼저 어젯밤의 상황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한응수 훈육주임은 우리를 교장실로 데리고 가서 교장선생님께 직접 다시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교장선생님께 모든 이야기를 한 뒤 대대장과 나는 각자의 교실로 돌아왔다.

아침조회를 하고 있는데, 갑자가 운동장 쪽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중동고 아이들이 학교 담을 부수고 쳐들어온 것이다.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규율부장 김동식을 비롯해 전교생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운동장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양 학교 간에 싸움이 일어났다.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투석전까지 벌어지자, 부상자도 발생했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하였고, 경찰이 사태를 진압하자 마침내 싸움이 마무리 될 수 있었다. 나중에 이 일은 신문에 보도가 날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다. 학교를 통합하고, 안 하고는 어른들이 할 일이었다. 학교 측이 나서자 우리는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이런 사건에 학생회장인 나는 본의 아니게 주동자가 되어버렸다. 이 일로 중동고의 학생회장인 이상진과 자주 만나게 되었고, 결국 친해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