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 때부터 반장을 도맡아 했다. 성적도 좋았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많아서 반장이 되는 것을 문제가 없었다. 나 또한 앞장서서 하는 일을 좋아했다.
성경구락부에 다닐 때 동화대회에 나간 경험을 살려 중학교 3학년 때에는 지역의 교회연합으로 열린 웅변대회에 나가 1등을 하기도 했다. 또 교회를 다니면서 중등부 회장을 맡기도 하고, 교회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모두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 시험을 보러가지 않았다. 집안형편이 어려우니 상급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이 괜스레 죄송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인 김형겸 선생님이 우리집을 찾아왔다. 마루에 앉아 하릴없이 햇볕을 쬐고 있는 나를 발견한 선생님이 꾸짓듯이 말씀하셨다.
“너는 공부도 잘 하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는데, 왜 고등학교 진학을 안 하는 거야?”
“아시다시피 우리 집은 형들이 모두 학교를 다니느라 집안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저라도 부모님 짐을 덜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녀석아, 멀리 내다봐아지. 상급학교에 진학하면 좀 더 좋은 곳에 취직을 할 수도 있고, 또 여러 가지 길들이 더 많은데, 집안형편이 그렇다고 포기를 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등록금을 낼 돈이 없어요.”
선생님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학비 낼 형편이 안 된다는 거지? 그럼 내가 학교에 말해 장학금을 받게 할테니 학교에 등록해라.”
선생님의 배려로 나는 수송전기공업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다 나처럼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닐 수는 없었다. 나와 같이 간 친구 유문남은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아, 중학교만 졸업하고 동네에서 과일장사를 했다.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그 친구가 우리 집에 과일을 배달해주기도 했다. 그는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지만, 훗날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연락이 끊겨 버렸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나는 다시 얻은 배움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반장을 했고, 학교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그런데 나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학교 공부에 치중하기 보다는 동아리 활동에 더 적극적이었다. 어려 모임을 만들었고. 문예부와 웅변부의 부장을 맡았다.
나는 어떤 모임에서든 자발적으로 앞장을 섰다. 학생회장의 감투를 쓰고 책임을 맡아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웠다.
하지만 빨리 취직을 하고 집안을 돕게 하기 위해 전기과가 있는 학교로 나를 보낸 아버지의 계획은 점점 멀어져갔다. 나는 취직반에 들지 않고 문과반을 선택했다. 아무래도 나의 적성을 문과계열이 맞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니, 학교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나는 동아리활동을 하면서도 시간을 쪼개 책을 가까이 했다. 괴테나 이광수의 작품을 좋아했고, 박종화의 역사소설도 좋아했다. 시도 좋아해 교과서에 나오는 시인들의 시는 찾아 읽고 암송하기도 했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여학생에게 인기가 있으려면 책을 좀 읽어야 했다. 사춘기 무렵이었고, 한참 이성에 눈뜰 나이였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뱇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이 내리는데 이미 발길은 끊어져........'
안톡 슈낙의 수필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읽다가 외운 구절을 이야기 끝에 인용하면서 다들 나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특히 여학생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동아리 활동으로 바쁜 와중에도 나는 꼭 책을 들고 다녔다.
한번은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벅 여사가 이화여대에서 강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강연이 너무나 듣고 싶어서 친구 윤극노와 함께 이화여대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이화여대는 남자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들키면 당장 쫓겨날 일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좋은 이화여대 누나들을 만났다. 우리를 몰래 불러들여 학교 관계자에게 들키지 않게 강당 좌석 가운데에 앉히고 무난히 청강을 하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여대 담을 넘어가고 또 들키지 않게 강당 가운데에 앉아 펄벅의 강의를 들었던 일은 지금도 떠오를 정도로 흥분되고 스릴 넘치는 일이었다.
글 쓰는 것도 좋아한 나는 글을 써서 발표되는 작문시간이나 고문(古文)시간을 좋아했다. 글을 잘 쓴다고 알려지니 친구들에게 연애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부탁을 자주 받았다. 그러면 나는 또 멋지게 연애편지를 대필해주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학교에 힘께나 쓰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 친구들은 여자친구들을 만날 많아서인지 더욱더 내게 매달렸다. 그들은 내가 대필한 편지를 들고가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사귀는데 유용하게 써먹었다.
우리 학교 주변에는 경기고, 중동고, 중앙고, 휘문고, 풍문고, 창덕고, 덕성여고, 숙명여고, 정신여고 등이 있었다. 가끔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출석부를 주고 출석체크를 하라고 하는 날이 있었다. 그러면 이 친구들은 나에게 출석체크를 부탁하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단골 가게인 안동주점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근처 우미관이라는 영화관으로 갔다. 거기에 가면 역시 학교를 빠져나온 여고생들이 있었다. 그러면 영화도 보고, 빵도 먹으면서 놀다오곤 했다.
힘께나 있고, 주먹께나 좀 쓴다는 그 아이들도 내게 보답을 했다. 그건 나를 지켜주는 일이었다. 나는 주먹을 쓰는 데는 약했고, 어떤 상황이든 대화로 풀어나가는 편이었다. 시내를 다니다보면 학교 깡패를 만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유 없이 시비를 걸고 푼돈이라도 뜯어내려는 수작이었다. 순진해 보이는 내가 그들의 목표물이 될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이 친구들이 나를 가운데에 넣고 가로막으며 보호해주었기에 늘 무사통과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여라 학교가 같은 장소에 소풍을 가게 되면 각 학교의 힘께나 쓴다는 애들이 여학생을 놓고 싸움을 하늘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싸움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면 이 친구들은 먼저 나를 태웠다. 그리고는 “너는 여기에 가만히 있어.”하고 싸우러 달려 나갔다.
내가 연애편지 대필을 해주는 것 말고도 그들이 나를 보호해주는 이유가 또 있었다. 그들 중 한명인 김기수와 관련된 이야기다.
고1 영어선생님인 엄기준 선생님은 미국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우리들의 영어실력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이게 고등학생의 실력이냐?”
엄 선생님은 그 뒤부터 우리에게 하루에 단어 100개 쓰기란 과제를 주었다. 선생님은 매일 영어 단어 100개를 쓰고 외워 한달 뒤에 시험을 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