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살이의 비극 (5회)

다시 남쪽을 향해 걷는 힘겨운 피난살이가 시작됐다. 점점 양식거리도 떨어져갔다. 먹는 것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잘 곳도 마땅치 않았다. 칼바람을 멈출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그날 밤을 보낼 장소였다.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 먼저 타격을 입은 건 어린아기였다. 당시 둘째 형수는 돌잡이 아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섰다. 형수가 제대로 먹지를 못하니 젖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내 조카인 그 아기는 내내 울다가 지쳐 잠들곤 했다. 세찬 눈보라가 치고 잘 곳조차 마땅한 곳이 없었던 어느 날, 나는 옷가지를 둘둘 감고도 벌벌 떨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런데 아침이면 영낙없이 울던 그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얼어터진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한쪽 구석에서 고개를 박고 흐느끼는 사람이 있었다. 둘째 형수였다. 형수 주변으로 부모님이 보였고, 첫째 형수가 둘째 형수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그 아기가 밤사이 얼어 죽었던 것이다.

첫 아이를 잃어버린 둘째 형수의 서러운 흐느낌에 나도 눈물이 났다.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흐느끼는 그 모습이 더욱 더 불쌍해보였다. 아기는 깨끗한 무명천에 싸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아버지와 다섯째 형이 어디선가 나무판지를 구해와 얼어붙어 있는 땅을 팠다. 삽 같은 연장이 없으니 조그마한 아기를 눞힐 만큼의 땅을 파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땅을 파는 동안 둘째 형수는 내내 가슴에 아기를 안고 있었다. 형수도 지쳤는지 울음소리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아기를 차가운 땅 밑에 눞히고 그 위로 흙을 덮었다. 어느 샌가 또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과 함께 아기는 흙으로 덮어갔다. 흙을 다지는 동안 둘째 형수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아기의 울음을 부르며 큰 소리로 울었다. 그때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고, 형수의 울음소리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갔다.

슬프고 절망스런 현실이지만 우리는 또 다시 그곳을 떠나야했다. 이미 눈은 내 무릎까지 쌓이고 있었다. 쌓인 눈을 뚫고 걸어가려니 더욱 힘이 들었다. 앞서가던 다섯째 형이 눈 속에서 꼬꾸라졌다. 먹은 것도 제대로 없는 데다가 나에게 먹을 것을 양보까지 했으니, 힘에 겨워 쓰러지고 만 것이었다.

어머니가 얼른 달랴가 쓰러진 형을 안고 뺨을 때렸다. 가까스로 눈을 뜬 형은 졸린 듯했다. 자꾸 눈을 감으려 했다. 다섯째 형이 물을 떠서 여섯째 형의 입에 흘러 넣었다. 그제야 형은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그날은 더 피난행렬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 근방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다.

피난살이의 종착지

서울을 떠난 지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식구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충청북도 증평군에 있는 증평읍이었다. 그곳에서 며칠을 쉬어가기로 하고 우리는 적당한 곳을 찾아 짐을 풀었다. 먹을 것도 거의 다 떨어졌기에 식량이 될 만 한 것을 구해야 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부터 증평읍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증평읍으로 들어온 장사꾼을 만났다.

그는 건조한 파래를 파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파래 장사꾼과 몇 번 함께 하더니 결국 그의 꾐에 넘어가 남아 있는 재산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한학만 했던 아버지는 세상물정에 어두웠다. 장사꾼은 그 점을 노려 아버지를 구슬렀고, 결국 사기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와 다섯째 형이 사기꾼을 사방팔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이미 그는 멀리 떠난 후였다.

▲ 1.4후퇴 당시 피난길 노상에서 밥을 해먹는 피난민들

그나마 남아 있는 재산까지 다 털려버렸으니 우리는 그야말로 무일푼 신세였다. 우리 가족은 증평읍의 동쪽에 있는 괴산군 정안면으로 갔다. 괴산군을 가운데 두고 서쪽으로는 청주시, 북쪽으로는 진천군, 동쪽으로는 청안면이었다.

사기를 당한 증평읍에 계속 있을 수 없으니 다른 곳으로라도 옮겨서 살아야했다. 돈 한 푼 없으니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는 일도 어려웠다. 그때 아버지는 청안면에 있는 청안초등학교에 피난민 수용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청안초등학교 피난민 수용소게 가서 어떻게 설득했는지, 우리는 곧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 어머니와 형수가 품앗이를 해서 먹을 것을 얻어왔다. 그렇게 그곳에서 몇 달을 어렵게 살았다. 배고픈 것이 무엇인지 사람이 절박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절실하게 느끼는 나날이었다.

나는 그나마 어려서 내 앞가림만 했고, 더 어린 동생 홍규와 순이는 형들과 형수들이 보살폈다. 그때 홍규가 여섯 살, 순이가 네 살이었다. 어린 우리를 보면서 부모님과 형수들의 걱정은 날로 늘어갔다. 특히 가장인 아버지는 막중한 책임에 늘 어두운 안색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바깥에 나갔다가 돌아온 아버지의 표정이 밝아보였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서 짐을 싸라며 채근했다. 짐이라고 해봤자 몇 가지 되지 않았으니 금세 짐이 다 꾸려졌다. 아버지는 그중 짐이 가장 큰 보따리를 지면서 호기롭게 앞장을 섰다. 우리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피난민 수용소의 천막을 벗어났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멀지 않았다. 청안초등학교가 있는 교장관사였다. 관사로 쓰던 곳이니 천막촌에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좋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우리 가족이 관사에서 살수 있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천막촌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나았기에, 그동안의 고생이 아주 먼일 같았다.

관사에 사는 동안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책도 읽어주고 한문도 가르쳐줬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편지나 문서 같은 것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면 마을사람들도 얼마되지 않아도 쌀을 좀 보태주곤 했다. 형수들이나 어머니도 마을에 가서 허드렛일이나 동네 일을 해주고 쌀을 얻어왔다. 쪽박을 들고 가 밥을 얻어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관사에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전쟁 통에도 학교는 문을 열 준비를 했다. 학교가 개교하면서 우리는 관사를 비워주어야 했다. 학교가 개교하는 것을 보니 나는 내가 다니던 숭인초등학교가 생각났다.

나는 가끔 청안초등학교를 찾아가 담장밖에 서서 학교 안을 기웃거렸다. 교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아이들이 단체로 대답하는 소리, 풍금소리와 함께 들리는 노랫소리, 그리고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수업 시작을 알리는 학교 종소리.......

모두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학교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피난민 신세인 것도 어렴풋이 알았다. 그러니 부모님께 말은 못하고, 혼자서만 속으로 끙끙 앓았다.

아버지는 관사를 그렇게 빨리 비워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급하게 방 하나를 얻었다. 방 하나에 부모님과 두 명의 형과 누나, 여동생, 그리고 형수 두 명과 나까지 모두 열 식구가 한방에서 지내야 했다. 밤에 오줌을 누러 나갔다 오면 누울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전쟁 통의 긴 피난세월동안 가족들이 흩어지지 않고 그렇게 모여 그렇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우리 가족은 1년 몇 개월을 그곳에서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