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후퇴 피난생활 (4회)

1.4후퇴 피난생활

서울로 돌아온 우리집은 다들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서민들의 몫은 생활전선에서 분투하는 것이었다. 형들도 각자 자신들의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 여섯째 형은 예전처럼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이미 나는 예전의 나가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본 시체들이 신흥사로 피난 갔던 밤의 기억을 안고 있는 한 나는 예전의 철부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겉으로는 일상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보여도 다들 마을에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도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던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책보만 던져두고 산으로 들로 친구들과 다니기 바빴는데, 왠지 그전만큼 신이 나지 않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책이었다. 집에는 형들이 많아 이런저런 책들이 많았다. 만화책도 있고 동화책도 여러 권 있었다.

책을 읽다보니 책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책을 읽으면서 공상의 세계로 빠지기도 했다. <어린왕자>를 읽으면서 나도 우주의 세계에 가보고 싶다거나 <톰소여의 모험>을 읽으면서 모험의 세계로 떠나는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오성과 한음>을 읽으면서 장난기 많은 이항복과 이덕형의 우정을 보며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했다. 또 이순신 장군이나 최영 장군 같은 전기를 읽으면 어느새 용감하게 적들에게 맞서 싸우는 내가 보였다.

학교공부에도 재미를 붙였다. 특히 국어를 좋아했다. 국어책도 여러 번 읽으니 퍽 재미났다. 나중에 점점 글자로 된 교과서는 다 재미 있었다. 사회책이나 자연책도 좋았다. 하지만 숫자만 가득한 산수책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어느덧 겨울이 찾아왔다. 찬바람이 불면서 마을은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길거리에 마을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이 자주 보였다. 지나치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공군’, ‘후퇴’, ‘피난’ 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또 다시 피난을 가야 하는 건가.’

집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형들은 아버지와 방안에서 긴 시간동안 이야기를 하곤 했다.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는 장롱을 열어 보따리를 꾸렸다. 어머니의 보따리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1950년 11월 중국 공산군이 한국전에 개입했다. 막강한 인해전술로 무장한 중공군과 북한군에 맞서 싸우던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 두만강 전선에서 후퇴를 하게 되었다. 연말이 되자 서부전선에서는 임진강 전선까지 밀려났고, 동부전선에서는 12월 24일 흥남철수를 단행했다.

다음해인 1951년 1월 초 중공군의 3차공세가 시작되었다. 곧 서울이 함락된다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씩 리어카에 짐을 싣고 보따리를 이고 지고 마을을 떠났다. 우리 집도 그동안 챙겨둔 보따리를 챙겨 집을 떠나야했다.

▲ 1.4 후퇴 피란민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1951. 1. 5.). ⓒ NARA [출처 ; 오마이뉴스]

1월 4일 서울은 중공군에게 함락되었다. 1.4후퇴로 피난민들은 점차 늘어났다. 우리가 피난살이에 나설 때 큰형부터 넷째 형까지 모두 군대에 가 있었다. 장성한 형들까지 없으니 피난길은 더욱 고생스러웠다, 겨울 매서운 바람은 또 얼마나 추웠던가. 살을 에이는 바람에 짐을 든 손은 얼어 터졌고, 귀는 떨어져나가는 듯했다.

우리집은 가난한 피난살이의 경험 때문에 이번에는 무조건 남으로 내려갔다. 무거운 세간은 다 버렸다. 겨우 옷가지와 이불, 쌀 같은 당장 필요한 것만 리어카에 싣고, 어머니와 형수들은 보따리를 머리에 이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민의 행렬은 길고 느렸다. 가는 곳곳마다 남부여대(男負女戴)한 사람들이 행렬에 끼면서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고, 그만큼 속도도 늦어졌다. 하지만 살기위해서는 행렬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가다가 밤이 되면 아무 빈집에 들어가 밥을 해먹고, 고단한 잠에 빠져들었다. 나중에는 빈집에도 다른 피난민들로 꽉 차 들어설 곳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길바닥에 리어카를 세우고 요기를 하거나 밤을 지새워야 했다.

긴 행렬을 따라가다 보면 어린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을 피할 곳도 없는 곳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어대니 아이들의 어린 살갖은 동상이 걸리기 일쑤였다. 행렬 곳곳에서 아파서 우는 아이들과 배고파서 우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도 볼과 귀에 동상이 걸려 그 아이들의 고통이 얼마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온종일 걸어도 겨우 3~40리 밖에 가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과 추위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가는 길에 한강 위로 우마차가 가다가 얼음이 깨져 빠져죽는 것도 보았다. 사람들도 여럿 빠져죽었다. 하늘 위로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비행기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조용한 밤이면 어디선가 폭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심코 두려운 여러 날이 지나고 있었다.

어느덧 걷다 보니 안성쯤에 도착했다. 세찬 바람에 눈보라가 치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눈보라를 뚫으며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앞사람만 보고 걸어가고 있었다. 눈은 점차 쌓여가고 있었다. 발까지 동상에 걸리면 안 되니까 조심조심 걸어가는데, 문득 주변이 허전했다. 뒤를 돌아보니 가족들이 보이지 않았다.

수레를 끌고 가던 아버지도 보따리를 이고 걸어가던 어머니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겨우 열 살이던 나는 어린 마음에도 계속해서 피난행렬만 따라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옷차림과 모자와 목도리를 쓴 사람들 속에 내 가족들은 누구하나 보이지 않았다. 순간 나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머니-” 하고 불러 봐도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중에 누구하나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내 볼을 타고 내린 눈물이 찬바람에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날씨는 갈수록 차가워지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눈물도 나지 않아 마른 울음만 삼키고 서있는 내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뒤돌아서 까치발을 하고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니 형수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몇 시간 만에 나는 가족들과 상봉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따라다녀야지.” 하고 야단을 쳐도 나는 그저 좋았다. 다섯째 형이 내 손을 잡으며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절대 내 손을 놓치지 말아.” 하고 씩 웃으며 말하자, 나는 그제야 눈물이 났다. 어느새 어두워져서 우리 가족은 그 자리에 짐을 풀고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기로 했다.

짐을 풀고 있는데 총을 멘 국군이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가 도착한 안성 주면에는 군대 막사가 군데군데 있었다. 잠시 후 형수들이 어디론가 국군에게 끌려갔다. 어머니의 말씀으로는 국군들의 밥을 해주기 위해서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형수들이 국군들의 밥ㄷ을 해주는 동안 우리는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며칠 동안 멏끼의 밥을 해주고 나서야 형수들은 풀려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