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으로 가족들의 피신 (3회)

집으로 돌아온 우리 가족은 모두가 지쳐보였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멍하니 앉아 허공만 응시했다.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다들 정신이 반쯤은 나간 것 같았다. 조용히 집안의 침묵을 깨뜨린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서둘러 함지박에 쌀을 퍼 담아와 안쳤다. 부엌에서 밥 끓는 소리가 나자 내 배에서도 그제야 꼬르륵 소리가 났다. 서너 끼를 굶었던 탓이었다. 난리 통에서도 어머니는 정신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제 식구들 밥을 해서 먹이는 일이었다. 먹고 힘내고, 먹고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어머니는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전쟁은 막 시작되었지만 일상생활은 그런대로 유지되었다. 아직 어린 나는 언젠가 올 전쟁의 환란을 미리 내다볼 수 없었다. 나는 예전처럼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학교는 예전과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하는 김일성 장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반 친구들은 하나둘씩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학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점점 먹을 것이 부족했다. 우리 집은 가난하긴 해도 포천에서 아직 농사를 짓고 있어서 배고픔에 시달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전쟁이 나자 우리집 도 먹을 게 없어서 차츰 끼니를 거르는 때가 많아졌다.

어머니와 형수들이 잠실 뻘에 가서 배추나 무를 주워와 팔아 겨우 끼니를 챙겼다. 식구는 많은데 먹을 것이 없으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아버지는 형들과 나를 포천 할아버지 댁으로 보냈다. 시골에 가면 그나마 먹을 것은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문제는 장성한 형들이었다. 전쟁이 터지니 형들이 언제 전쟁터로 끌려 나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큰형은 형사생활을 했기에 잡히면 더 큰 일이었다.

형들과 누나 그리고 나는 리어카에 짐을 싣고 포천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울에 좀 더 남아있다가 오신다고 했다. 리어카를 끌고 당기고, 밀면서 우리 형제들은 포천으로 향했다.

포천까지는 100리길이었다. 게다가 가는 길도 울퉁불퉁하고 좋지 않아 걷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 길을 리어카로 끌고 가야했으니, 그 고생은 말로 다 못할 지경이었다. 가는 동안 또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몰라 두렵기도 했다. 이른 새벽에 출발하였지만 가다가 숨고, 또 가기를 하다 보니 밤이 늦어서야 할아버지 댁에 당도할 수 있었다.

포천 할아버지 댁에 당도하자마자 큰형을 비롯해 둘째, 셋째, 넷째ㅔ 형까지 포천 가산면에 있는 뒷산에 몸을 숨겼다. 형들이 있던 뒷산에는 동네 청년도 몇 명 같이 기거하고 있었다. 첫째 형수와 둘째 형수는 음식을 해서 빨랫감과 함께 음식을 넣은 함지박을 이고 몰래 형들에게 전달했다. 마치 빨래를 하러나온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나는 포천에 있는 작은댁으로 가야했다. 할아버지 댁도 먹을 게 변변치 않으니 어린 나를 그나마 좀 사는 작은 댁에 보낸 것이다. 그런데 작은 댁 당숙은 구두쇠였다. 그 집에는 내 또래의 아들이 있었는데, 같이 밥을 먹으면 늘 그 아이는 밥을 늦게 먹었다. 나는 밥상을 받으면 밥을 푹푹 퍼서 잘도 먹는데, 그 아이는 영 밥 먹는 것이 시원찮았다. 그 모습을 보던 당숙은 식사 때마다 자기 아들을 막 야단을 쳤다.

“사내 놈이 밥 먹는 게 왜 그 모양이야. 성균이 봐라. 제집 아닌 곳에서도 저렇게 염치 좋게도 밥을 잘 먹잖니?”

▲ 미아리에서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국군을 제압하고 서울에 입성하는 북한군

어린 나이에도 그 말이 나를 나무라는 것임을 느꼈다. 구두쇠 양반인지라 내 입에 들어가는 밥이 아까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표 나게 구박할 수는 없어 당신의 아들을 혼내는 척 했던 것이다.

그 뒤로 밥을 먹을 때마다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눈칫밥인데도 밥맛은 왜 그리 좋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한 끼 밥을 먹는다는 것은 자존심을 버리고서라도 꼭 내가 해야 할 임무처럼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던 중에 할아버지 생신날이 돌아왔다. 집안의 제일 큰 어르신의 생신인지라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좀 넉넉하게 음식상이 차려졌다. 산속에 숨어서 주먹밥만 먹던 형들도 모처럼 산에서 내려왔다.

담 밖으로 소리가 나가지 않도록 조용하게 밥상을 차려 온 식구가 둘러 앉아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대문이 확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총을 멘 인민군들이 쳐들어왔다. 형들이 산에서 내려왔다는 소문이 그새 인민군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지만, 곧 네 명의 형들은 모조리 인민군에게 끌려갔다. 형들이 끌려간 뒤 집안 어른들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땅만 바라보며 한숨만 쉴 뿐이었다.

나는 두렵고 무서워 형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심장이 요동치듯 떨려왔다. 나는 대문 밖으로 나가 멀어져가는 형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참내 형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끌려간 형들이 다시 돌아온 것은 이틀만이었다. 인민군들도 엉성했던지, 큰 형은 인민군에게 동조하던 마을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 빼돌려졌고, 둘째 형과 셋째 형은 화장실에 간다하고 도망쳐 나와 보리밭에 온종일 숨어 있다가 돌아올 수 있었다. 넷째 형도 그 뒤 탈출에 성공해 무사히 돌아왔다. 죽을 줄로만 알았던 형들이 돌아오니 집안에는 다시 화색이 돌았다.

그해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전술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탈환작전이 시작되었다. 사나흘이 지나자 유엔군이 김포와 영등포 두 방향에서 서울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낙동강 전선에서도 국군과 유엔군이 승리하고 있다는 소식이 조금씩 전해졌다.

기운이 빠진 것은 인민군이었다. 길을 나서면 보이던 북한군이 점점 보이지 않았다. 포천에도 국군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 형들에게 들었는데, 포천의 육사출신인 소령이 지나가다가 동네 청년들에게 남은 괴뢰군을 처단하라며 칼빈총을 볓 자루 주었다고 한다. 형들도 동네청년들과 교대로 칼빈총을 메고 동네 치안유지를 위해 마을을 돌아다녔다.

마침내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9.28수복이다. 석 달가량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은 완전히 물러났다.

우리는 다시 서울에 있는 미아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포천에 올 때처럼 다시 리어카에 짐을 싣고 뒤늦게 포천에 온 부모님과 형수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함께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포천에서 몇 달을 보낸 뒤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포천으로 갈 때처럼 발걸음이 무겁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