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 (2회)

내게는 형들이 많았다. 큰 형은 형사였는데, 한국전쟁 시기에 한국전력에 들어가 근무했다. 양복기술을 가지고 있던 둘째 형은 한국전쟁 때 군대에 오래 있다가 나와서는 중앙대학교에 비서 겸 운전기사로 취직했다. 셋째 형은 형수와 함께 포천에서 농사를 지었고, 넷째 형은 사업을 하셨다. 다섯째 형은 노동청 산하의 공무원이었고, 여섯째 형은 중앙대학교 도서관에 근무하셨다.

내 위로 누나가 한 명 있었고, 나는 여덟째였는데 내 밑으로도 동생이 한명, 여동생 한명이 있었다. 그중 누나와 여동생은 어렸을 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집안에 가장 도움을 준 사람은 둘째 형이었다. 내게 용돈은 잘 챙겨준 사람은 둘째 형과 여섯째 형이었다. 그 많던 형들은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남동생과 누이도 세상을 등진지 오래다. 아버지도 오래 전 작고하셨고, 어머니는 내가 환갑 때 <만남의 사회복지> 책을 쓰고 있는 동안 98세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를 찾아뵈면 “피곤할 텐데, 어서 가 쉬어라.”고 말씀 하시면서 내 손을 꼭 잡으시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시절은 다들 어렵게 살 때였다., 가난한 동네여서 한 끼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집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형들과 부모님 덕분에 부족하긴 해도 배를 곯지는 않았다. 이렇게 많은 형제자매들과 부대끼면서도, 우리는 진인사대천명의 가훈을 기억하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나의 낙천적인 성격과 친화력은 대가족 속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지만, 잘 날 없이 바람이 불었기에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이겨 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급작스런 피난

1950년 6월 25일. 다급하게 뛰어다니던 소리가 들려 잠이 깼다. 어젯밤만 해도 같이 자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옆에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방문을 열려는 찰나 어머니가 버선발로 방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어서 옷 입고 빨리 나와라.”

어머니의 다급한 표정에 나는 얼른 옷을 입고 바깥으로 나왔다. 어디선가 굉음을 지르며 낮게 나는 비행기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곧 형들과 형수들이 방 여기저기에서 뛰쳐나왔다. 모두 작은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나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는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온 가족이 혼비백산 하여 정신이 없는 듯해보였다. 길을 나서자 사방에는 온통 우리처럼 보따리를 짋어진 사람들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앞서가는 사람들 중에 친구 녀석이 눈에 띄어 손을 흔들었는데, 그 아이는 넋이 나간 듯 나를 보고도 알은 체 하지 않았다.

▲ 한국전쟁 발발 두달 전인 1950년 4월 숭인초등학교 봄소풍

“난리가 났다.” “괴뢰군이 쳐들어왔다.”

한 사람이 뛰어다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 갑자기 무서워진 나는 바쁘게 걸어가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여섯째 형이 어느새 따라와 내 손을 움켜쥐면서 말했다.

“전쟁이 났다. 북한군이 쳐들어왔어. 우리도 빨리 숨을 곳을 찾아야 한대. 내 손 놓지 말고 잘 따라 와야 해.”

초등학교 3학년, 내 나이 열 살 때였다. 전쟁이 뭔지도 모를 나이였다. 하지만 전쟁은 나이 여부를 가리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잔인하게 닥쳐와 삶을 짓밟아 놓았다.

전쟁이 나기 전 까지만 해도 내 삶은 평범함, 그 자체였다. 가난하기는 해도 평화롭고 한가로운 날들이었다.

8살에 숭인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한복으로 된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어께에는 책보를 둘러맸다. 집이 있는 길음동에서 대지극장 근처에 있는 숭인초등학교 까지 4km되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학교까지 걸어갈 때는 주로 6학년에 재학 중이던 여섯 째 형과 같이 다녔다. 최고 학년인 형과 걸어 다니니, 시비를 붙이는 녀석도 없었다.

먼지가 풀풀 나는 비포장도로를 40분 동안 걸어가는데도 신이 났다.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좋았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았고, 공부를 잘해 칭찬받는 것도 즐거웠다. 이 모든 일상이 깨져버린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나는 전쟁이 뭔지 몰랐지만, 두렵고 무서운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피난 길에 나선 우리 가족이 급히 숨을 곳을 찾은 곳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급작스럽게 전쟁이 터지는 통에 어디 멀리 갈수도 없었다. 우리는 정능에 있는 신흥사(현 홍천사)로 피난을 갔다. 집 한쪽에서 몸을 피하여 밤을 보내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끊이지 않고 들리는 폭격소리는 마치 바로 옆에서 터지는 듯했다. 수천 개의 천둥이 일시에 터지는 듯 총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귀를 막고 머리를 두 다리 속에 파묻고 있어도 귀가 얼얼했다. 그토록 기나긴 밤은 처음이었다. 얼마나 긴장을 하고 몸을 떨었는지, 시간이 지나도 굳은 몸은 좀체 풀리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서운 밤을 지새우고 새벽녘에서야 얼핏 잠이 들었는지 깨어보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총성은 어느 순간 멎어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서울은 모두 북한군에게 점령되어 있었다. 절에서 마냥 있을 수 없던 우리 가족은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길에는 군인과 인민군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시체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머리가 터져 피가 흐르는 시체 위로 수십 마리의 파리 떼가 윙윙거리며 날아다녔다. 팔이나 다리가 잘려나간 시체도 많았다. 우리는 길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시체를 최대한 피해 걸어갔다.

거리 곳곳에는 인민해방을 상징하는 붉은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길거리에는 여기저기 넘어져 있는 탱크와 트럭도 보였다. 짐에 와서 보니 난리 통에 셋째형은 총알이 귀를 스쳐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형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형은 넋이 반쯤 나간 듯 피딱지가 앉은 귀를 자꾸 만지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