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아리 촌놈’이다. 1941년 6월 21일 서울 성북구 삼선교 근방에서 태어난 나는 미아리(현재 미아동)에서 자랐다. 당시 미아리는 가난한 시골 동네였다. 해방 전에는 경기도 고양군 송인면에 속했던 미아리는 1949년 서울의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성북구에 편입되었다.
당시 미아리에는 대락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았다. 원래 미아리에 터를 잡고 살던 원주민들, 시골에서 어렵지 않게 살다가 여러 이유로 땅을 팔고 이사 온 사람들, 시내에서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언저리로 밀려난 사람들, 그 중에서 우리 집은 포천에서 이사 온 경우였다.
포천은 부모님의 고향이다. 내 본적은 미아리 미아동 600-1이지만 원적은 경기도 포천 군내면으로 되어 있다. 그곳은 한국정쟁 전만해도 수성 최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성촌이었다.
군내면에 살 당시 우리집안은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4대 조 할아버지가 흥선 대원군 스승일정도로 한학에 조예가 깊은 집안이었다. 그 윗대에도 이름난 학자를 많이 배출한 학자 집안이었다. 그런 탓인지 집안 분위기는 꽤 보수적이었다. 할아버지는 향교에서 훈장을 하셨고 아버지도 한학은 공부하신 분이다.
아버지는 독자(獨子)였는데, 일찍 아머니를 여의였다. 아버지는 다시 부인을 들이셨지만, 이 분에게서도 자식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친가 쪽으로는 사촌이나 고모가 없다. 아버지는 독자인데다가 어릴 때부터 몸이 연약해 집안에서 걱정이 많았다. 아버지의 잔병치레를 구완하기 위해 할아버지는 땅을 조금씩 팔아치웠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마을 이장을 하다가 서당에서 훈장 노릇을 하기는 했지만, 그나마 몸이 약해 제대로 된 수업을 갖지 못했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땅을 처분하는 일이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그 땅을 대부분 처분해 아버지를 서울 미아리에 터전을 잡게 했다. 다섯 번째 형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아버지(최병환)는 땅도 없고 누나도 없이 홀로 외롭게 자라서인지 형제가 많은 집안의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13살에 시집온 어머니(홍옥필)는 17살에 낳은 큰형을 시작으로 모두 열두 남매를 낳았다. 자식을 많이 난 어머니는 시집 식구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
아들 여덟에 딸 넷, 나는 그중 여덟째였다. 누나 한명과 여동생이 일찍 하늘나라로 가는 바람에 열 남매만이 같이 성장했다. 어머니는 자상한 분이셨다.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면서도 큰 소리 내는 법 없이 늘 우리 남매를 편에서 조용하게 뒷바라지 해주셨다.
가난한 동네였던 미아리에 살면서도 아버지는 양반이라는 긍지를 늘 강조했다. 형들의 가방을 열어보면 한문책들이 많았다. 내 위의 형들은 모두 한문을 배웠다. 그때 당시는 초등학교 정도 다니면 괜찮은 편이었다. 다섯 번째 형부터 신학문을 배웠는데, 그 뒤로부터는 신식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대체로 한문을 가르쳤다. 언젠가 내 가방을 열어보고는 “죄다 한글로 된 책이로구나. 옛날에는 10년을 공부하면 과거시험을 봤는데, 한글만 배우니 어찌 글의 원리를 깨치겠느냐.”면서 혀를 끌끌 차곤 했다.
|
|
| ▲ 1940년대 미아리 / 마을 위로 미아리 공동묘지가 보인다[출처 ; 성북마을아카이브] |
|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늘 아버지가 강조하시던 말씀이었다. 학교에서는 한글만 배우니, 당신이라도 한문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신 아버지는 내게 천자문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에 다닐 무렵까지 나는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신 교훈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었다. 이 글은 우리 집 가훈으로 전해졌고, 자녀들에게 이 교훈을 써서 남겨주셨다. ‘진인사대쳔명’은 모교의 김덕준 교수님도 나에게 해주신 말씀이어서 더욱 특별하기도 하다.
아버지는 많은 식구가 북적이는 것을 좋아하셨다. 우리 집은 미아리에서 제일 큰 집이었는데, 한옥으로 된 그 집은 70평 정도였고, 방이 7개나 있었다. 결혼한 형들도 함께 살았는데, 큰 형수, 둘째 형수, 셋째 형수 등 며느리가 보통 서너 명까지 같이 살았다. 살다가 한 형네가 분가를 하면 다른 형이 형수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집은 늘 북적거리기 마련이었다.
넓은 집이었고 방도 많았지만 식구가 많았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방은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부모님과 같은 방을 썼고, 중학교 때는 형과 같이 방을 썼다. 내가 혼자 방을 차지할 수 있었던 때는 고등학생이 되고 난 뒤부터였다. 조부모와 형수까지 합쳐 16식구가 한 집에 살았을 때니 나는 거기에 대해 별 불만이 없었다.
대식구가 되다보니 한끼 밥을 먹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밥상도 여러 개를 차려야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 상에서 먹고, 형수들은 윗목 가장자리에서 따로 밥상을 펴서 밥을 먹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어머니와 형님들과 함께 밥을 먹어야 했다 .한 끼 식사를 할 때마다 그 많은 밥상을 따로 차려야 했으니, 어머니와 형수들의 고생이 여간 아니었다.
그런데 여러 밥상을 차리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었지만, 그 밥상에 놓인 밥과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서 남자들의 경제력이 필요했다. 우리 집의 경제적인 기반이라고 해봤자 시골에 있는 땅 정도였다. 땅이 계속 자라는 것도 아닌데다가, 계속 땅을 팔 일만 생기니, 아버지는 은근히 걱정이 많았다.
그렇다고 한학을 하신 아버지가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몸이 약하셨던 아버지는 잔병치레를 자주 하셔서 드는 약값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하나뿐인 아들의 건강을 위해 할아버지는 온양온천에 몇 달씩 요양을 보내기도 하고, 당시 시골에서는 다니기 어렵던 서울대병원원에 입원을 시키기도 했다.
그렇지만 늘어가는 식솔들을 마냥 두고 볼 수만 없었던 아버지는 생각 끝에 외삼촌과 비단장사를 시작했다. 외삼촌도 외가 쪽에서는 독자(獨子)였는데, 아버지와 마음이 잘 맞아 꽤 자주 어울렸다. 외가는 남양 홍씨 집안인데, 집안만 보고 결혼을 시킬 정도로 알아주는 양반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이었으니,
외삼촌도 돈벌이에는 능력이 없었다. 아버지와 외삼촌, 세상 물정 모르고 학문만 하시던 분들이 잇속을 챙겨야 하는 장사가 맞을 리 없었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조금이나마 보태려 시작한 비단장사였지만, 번번이 손해 보기가 일쑤였다. 결국 비단장사 일은 얼마 못가서 완전히 망해버렸다.
하는 수없이 아버지는 복덕방을 차렸다. 그 당시는 부동산 중개소를 복덕방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뒤늦게 부동산중개업을 시작하신 건데, 이 일도 역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수입과는 상관없이 꽤 오랫동안 그 일을 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