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성경구락부는 배움에 목말랐던 내게 목을 축일 물을 주고, 절망에 고개 숙일 때 한줄기 빛이 되어준 곳이다. 나는 그 시절의 경험을 잊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간 뒤 나는 그때의 경험과 추억 때문에 미아동 감리교회에서 청년부 회장을 맡아 청년회 사업으로 웨슬리구락부를 만들었다.
웨슬리구락부는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야학이었다. 나는 1962년부터 1987년까지 늘 야학을 했다. 내가 어려웠을 때 받은 교육혜택과 선생님들께 받은 사랑을 다른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배우고자 해도 가난하거나 기회가 없어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웨슬리구락부를 통해 만난 학생들은 지금도 연락이 온다. 행운의 열쇠를 선물로 가져오기도 했다. 야학을 통해 가르치고 나눈 경험은 야학의 형태로는 아니어도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배워야 할 시간에 있는 청소년들을 가르쳐 건강한 시민사회 속에서 살아가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삶,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믿음과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선생으로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이끈 것은 정릉 성경구락부에서 받은 감동과 은혜 덕분이었다.
* 성경구락부(聖經俱樂部)
성경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초등교육과정을 밟는 청소년들의 모인이다. 일제 때 평양에 파송되어 있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 킨슬러(Kinsler. F. )dp 의해 조직되었다. 명칭을 ‘성경구락부’라고 한 것은 일제 아래에서 정규학교가 받는 심한 감독을 피하고, 매주 하루는 기도회를 열어 성경을 암송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자 한 이유에서 였다.
한국전쟁 후에는 생활의 궁핍으로 학교교육을 받을 수 없는 처지의 아동들과 전쟁 고아들의 성장과 향학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큰 소임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의무교육을 실시함에 따라 초등교육을 위주로 한 이 사업은 점차 중.고등학교 영역으로 발전되었다.
한편 감리교 선교사 제퍼리(Jefferey. F.)는 1954년에 이와 비슷한 사업을 ‘웨슬리구락부’라는 명칭아래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시작하였는데, 교육장으로 교회당을 사용함으로써 학생들은 교육을 받는 동시에 교회와 적극적인 연관을 맺음으로써 선교에도 큰 성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사업은 경제적인 발전과 사회사정으로 정규교육의 기회가 확장됨에 따라 자연 소멸되고, 성인교육프로그램으로 연결되어 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 387쪽,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웅진출판 1991.)
무작정 찾아간 숭인초등학교
고등공민학교(성경구락부)는 초등학교 3,4학년 과정만 가르쳤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어린 내 생각에도 검정고시를 보게 되면 중학교에 갈수 없댜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나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다녔던 숭인초등학교를 찾아갔다. 또래 친구들이 6학년이었기 때문에 나는 친구들에게 말해서, 6학년을 담당하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내가 사정을 말씀드리자 그 선생님은 난색을 표했다. 한참 생각하던 선생님은 6학년으로 월반하는 것은 안 된다고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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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후, 50년대 중반 초등학교 교실 풍경. 칠판 위에 태극기와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 박대헌(완주 책박물관 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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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학년이 많이 높아지면 공부가 많이 뒤쳐지고 힘이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6학년은 교과과정뿐만 아니라 중학교 입시 준비를 해야 하니 선생님의 입장에서도 많이 난감했을 것이다. 당시는 중학교 입시 준비를 하는 것도 꽤 치열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5학년을 담당하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때 5학년의 한반을 담당하던 강덕호 선생님을 만났다. 나는 고등공민학교에서 4학년 1학기까지 한 상태였다. 나는 강덕호 선생님에게 피난생활을 하느라 또래 친구들보다 3년이 늦어졌고, 고등공민학교에서 공부했던 나의 생활을 알렸다.
다행히 강덕호 선생님은 5학년 2학기 과정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주었다. 3년을 묵었다가 1년을 월반한 셈이었다.
한 반의 학생 수는 100여명이었다. 그야말로 교실은 콩나물 시루였다. 작은 교실에 학생들이 그야말로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키가 컸기 때문에 맨 뒤에 앉았다. 친구 중에는 나처럼 전쟁 때문에 공부가 늦은 아이도 있었지만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닌 아이들은 나보다 2년 아래였다. 그렇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 내 별명은 ‘할아버지(영감)’와 ‘거북이’였다. 할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내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옛날 이야기들을 많이 해줬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이 되면 우리들은 난롯가에 옹기종기 모였다. 나는 역사책이나 소설책을 좋아해서 책을 많이 읽었다. 당시 인기를 끌던 <홍길동전>이나 <얄개전>같은 이야기는 꿰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연 아이들은 귀를 쫑긋하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나는 신이나 책에서 읽은 내용이나 이야기들을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성경구락부에 있을 때 동화대회에 나가 입상활 정도였으니 입담이 제법 좋았다. 재미있을 이야기를 해주니 남자아이들뿐만 아니라 여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또 하나의 별명인 거북이는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보기에 내 행동이 느릿느릿하다고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유교적인 집안 분위기가 스며있었을 지도 몰랐다. 별로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아이들 보기에는 내 행동이 느리게 보였을 수도 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무언가를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딱지나 구슬, 성낭갑 같은 것을 모으기도 하고 책도 많이 모았다. 특히 만화책을 많이 좋아해서 집에 만화책이 많았다. 나는 집 벽 양쪽에 굵은 고무줄을 걸어놓고, 만화책을 꼭 걸어두곤 했다. 그리고는 친구들이 집에 놀러올 때면 자랑스럽게 그것을 보여주곤 했다.
5학년 때 친하게 잘 지냈던 친구들, 이종웅, 이상일, 박충기, 이성철, 장영조, 이순익, 박완수, 이철, 김명호, 김갑팔, 윤태화, 박기우, 홍무웅, 이정환 등의 남자 애들과 최화자, 장영순, 박신자, 전정희, 서화자, 이영수, 이만자, 강정옥, 이혜숙, 이금자 등이 생각난다. 그 중 서화자는 몇 달 전에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5학년 담임인 강덕호 선생님은 세계지리 담당선생님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도 세계의 역사나 전쟁사 지리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매일 수업 마지막 시간에은 음악을 가르쳤다. 풍금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음악시간이 참으로 좋았다.
늦은 오후에는 저물어 교실 창밖에는 석양빛에 붉게 물들어갔다. 낡은 풍금소리와 서정적인 가사의 노래가 어우러지면 그야말로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의도했든 안 했든지 간에 선생님의 음악수업은 자못 거칠어지기 쉬운 아이들의 마음을 순화시켰다. 그건 음악수업을 통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