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 선생님 박순실 선생님은 특별히 나와 김선무, 이정순, 김옥분, 윤태화, 최문석, 윤부현, 이성복 등의 친구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아주었다.
어느 날 박순실 선생님 댁에 가 있었는데, 마침 닭이 알을 낳았다. 당시는 달걀이 무척 귀한 시절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불러내더니 아직 따뜻한 달걀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선생님에게는 내 또래의 아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차별하지 않고 나에게 달걀을 먹으라고 따로 불러낸 것이다.
선생님이 나에게 “장래에 훌륭한 일꾼이 되어라.”며 따뜻한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모습은 지금도 내 마음 한 곳에 고이 남아있다.
김교성 선생님은 나에게 동화대회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 동화대회에는 예수회장로교 소속의 각 교회 성경구락부 학생대표들이 참가하는 큰 행사였는데, 주로 영락교회에서 열렸다. 평소 나는 책을 읽을 때 또박또박 잘 읽는다는 칭찬을 자주 받았다. 그것을 눈여겨 본 선생님이 나를 동화대회에 추천해주었던 것이다. 나를 믿고 추천해주셨기에 나는 영락교회가 주관하는 동화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는 것으로 보답했다.
동화대회 때 일을 떠올리다보니 생각나는 게 있다. 동화대회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자 담임선생님은 나를 중국집으로 데리고 갔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선생님이 주문을 하고 나서 얼마 뒤, 움푹한 접시에 담긴 국수가 나왔다. 면이 일반국수보다는 넓은데 그 위에 까만 소스가 덮여 있었다. 선생님은 이 국수를 짜장면이라고 하며, 비벼서 먹으면 된다고 했다.
면을 비빌 때마다 침이 꼴깍 꼴깍 넘어갔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었다니......’
달짝지근한 양념에 부드러운 면발, 나는 고개 한번 들지 않고 먹는 데만 집중했다. 줄어드는 짜장면이 아까울 정도였다. 소스까지 남김없이 싹싹 먹고 나서 비로소 고개를 들자, 선생님이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외식을 한 것도 처음인데,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라니, 나는 그때 짜장면 만큼 맛있는 음식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맛이 생각나 가끔 짜장면을 먹어보지만, 그때의 맛을 느낄 수가 없다. 그것은 배고픈 시절에 처음 먹은 짜장면의 황홀한 맛과 더불어 선생님이 내게 주신 사랑의 맛이었다.
심재소 선생님은 나와 정순, 인애, 선무, 성복 등에게 무료로 과외도 해주었다. 수업이 끝난 뒤 따로 집에 데리고 가서 공부를 더 가르쳐 준 것이다. 공부를 더 해야 하는 아이, 상급학교에 진학을 할 아이 등을 데리고 가서 좀 더 집중적으로 공부를 시켰다.
그것은 우리들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 오로지 우리가 잘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에 선생님의 시간을 더 할애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었던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열정과 인간 사랑에 관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또 알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서민들은 모두가 어렵고 힘들었다. 늘 배가 고팠고, 집이며, 동네며 환경도 열악했다. 그 시절은 또한 정신적으로도 피폐한 사람들이 많았다. 앞날에 대한 불안과 막막한 하루를 견뎌야 하는 팍팍한 현실은 가슴 속 상처가 되곤 했다. 그것은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순간순간 떠오르는 전쟁의 기억으로 힘들 때가 많았다. 겉으로는 별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기억들은 가슴속 깊이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 상처를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 준 곳이 이 학교였다. 나는 알게 모르게 이 학교에서 상처를 치유 받았다. 그것은 선생님들이 주신 사랑 때문이었다. 친구들과의 우정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점심배급으로 나온 꿀꿀이죽을 먹으면서 나는 막연히 어려운 현실을 견딜 수 있었다. 또 선생님들이 우리를 최대한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려해주고, 열심히 가르쳐 주어서 그 어려운 시기를 너끈하게 살아낼 수 있었다.
그곳은 내실 있는 인격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선생님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주고, 방향도 제시해주면서, 평소 갖추어야 할 교양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러한 가르침이 있는 정릉교회 성경구락부는 내게 특별한 곳이었다.
성경구락부는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에 다 있었는데, 그 수는 300개가 넘었다 성경구락부 교육과정은 정규 초등학교와 똑같았는데, 거기에 성경과목이 더 들어있었다.
그곳은 내 삶에 큰 방향을 일러준 곳이다. 거기서 만난 선생님들 때문에 나는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좋은 분들이 다니는 곳이 교회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인 독립운동가 박희도 선생님의 딸인 박순실 선생님과 이 분의 딸이자 담임선생님인 심재소 선생님, 그리고 김교성 선생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쳐주고, 성경을 가르쳐주었다.
특히 나의 첫 번째 스승인 박순실 선생님의 인자한 표정과, 조용한 성품, 나를 위해 늘 기도하시던 그 모습은 살아오는 내내 내 삶의 지표가 되었다.
나의 신앙관은 이때 형성되었던 것 같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경구절을 신실하게 실천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느덧 내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모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든다.
그때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은 그 후로 오랫동안 서로 연락하며 지냈고 가끔 만났다. 이제 세상을 떠나거나 거동이 불편한 친구들도 있지만 늘 마음만은 함께 하고 있다. 친구 중에 이정순이라는 여자 친구도 생각이 난다. 이 친구는 스웨덴으로 이민을 가 스톡홀름에 살고 있다. 남편이 에릭슨 전자 사장도 지냈으니 시집도 잘 간 셈이다.
나는 스웨덴에 갈 때면 꼭 그 집을 방문했다, 그 친구도 한국에 오면 꼭 우리 집에 들렀다. 이런 친분을 이어서 그의 딸 엘리자벳과 아들 마티아스는 우리 집 딸과 아들과고 가깝게 지내면서 친형제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내가 암수술을 하고 쉴 때 일본에서 근무하던 그의 아들인 마티아스가 봉투를 들고 우리집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다. 비록 몸은 멀리 있지만 마음만은 함깨 한다는 위로와 격려를 보내준 것이다.
이처럼 서로의 우정을 같이 나누던 친구는 이정순 뿐만 아니었다. 이성복, 김옥분, 김선무 등은 그 학교를 다닐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고 성적도 좋았다. 김선무는 나중에 장교가 되었다.
또 윤태화, 최문석, 윤부현 등도 모두 가까운 친구들이다. 최문석은 하늘나라로 먼저 갔지만 윤태화는 요즘도 자주 만난다. 김옥분은 숙명여대 영문과를 나와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지금도 동창회 모임을 하는데 만나면 팔순이 다된 나이에도 예전 선생님들의 따뜻한 가르침을 되새겨보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