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부터의 탈출 (5회)

청량리역을 떠난 밤열차는 7월 중순의 무더운 여름밤의 어둠을 뚫고 북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차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도봉산을 바라보면서 저 아름다운 산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열차는 철원(鐵原)을 지나 평강(平康)에 도착하고 보니 전쟁이 아닌 평화로운 적막과 고원지대의 아름다움 농촌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우리가 근무한 병원은 옛날 경성제대 부속 결핵 요양소(療養所)로 비교적 현대 건축 양식의 건물이었는데, 이곳을 북괴가 군 병원으로 사용하면서 주로 경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약 2개월 동안 민간인 의사 자격으로 일해야 했는데, 별다른 일은 없었으나 서울에서 온 의사 세 사람은 감시를 받으면서 허송세웡을 보내고 있었다. 탈출방법도 여로모로 생각해보았지만 전투상황을 알 길이 없었고, 서울까지 가는 길이 막연하여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9월로 들어서자 갑자기 후송되어 오는 환자수가 늘었으며 중상환자가 많아졌다. 우연히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조용한 농촌의 지평선 너머 남쪽으로부터 포성이 들려왔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나에게 결단과 해방의 날이 가까워오는구나 생각되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장교병실에 드나들면서 마음 좋아 보이는 환자에게 접근하여 가끔 전황에 관하여 물어보기도 하고 포성이 들리는 곳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는 등의 방법으로 지식을 쌓았고, 경비소대에도 한두 사람 대화가 통할 사람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한편으로는 유엔군이 38선 가까이까지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정신력으로는 우리보다 월등히 강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공산군도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취약점이 곳곳에서 드러났고, 일대 혼란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병원의 규율과 환자들의 위계질서에도 혼란이 오고 대부분 공포에 질린 듯 우왕좌왕 하는 모습이 유엔군이 38선을 넘고 나서부터 더욱 심해지는 듯 했다.

특히 고급장교나 장성급은 후퇴하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국군이 기습을 받은 후 불리한 전세에서도 끈질기게 항거하고 대부분의 국민들도 정신적으로 굴복하지 않고 버티어나가고 있는 것과 비교해보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우수성에 더욱 자신을 갖게 되었다.

포성이 점점 가까워지자 병원을 폐쇄하고 전원 후퇴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밤중에 전원을 집합시켜놓고 하나하나 점호하여 행군조를 편성했다. 무장한 1개 소대 병력이 행렬의 전후방에서 호위하면서 북으로 향하게 되었다.

보행할 수 없는 부상자들은 전원 총살하여 매장했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한 번 공산당의 비인도적인 잔인성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에는 행군하고 낮에는 농가에 분숙하면서 황해도의 이천, 곡성을 거쳐 북상했다.

유엔군의 공습이 상당히 활발하여 우리들은 주로 산속에 있는 도로의 양쪽을 따라 행군할 수밖에 없었다. 황해도를 넘기 전에 반드시 탈출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밤중에 산속을 걸어가니 주위 사정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미군의 위치를 전혀 짐작도 못하는 터에 섣불리 탈출을 시도했다가는 잡힐 것 같아서 결심을 못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부터 같이 간 의사 이 선생과 성 선생도 결심을 못하고 주저하는 것이 역력했다.

▲ 1950년 10월 8일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경하는 국군행렬. 그럼으로써 북한군은 황해도를 넘어 함경도 지역까지 후퇴를 하게 되었다. [출처 ; 양양문화원]

황해도를 지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초조해했으나 행렬은 어느새 평남의 강동(江東)부근까지 도달했다. 야간인데도 공습은 계속되었고 트럭들이 공격을 받아 불에 타고 있는 광경도 가끔 볼수 있었다. 또 우리 측의 게릴라부대가 발사하는 신호탄이 밤하늘에 솟아오르는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번 결단의 순간을 맞게 되지만 바로 그때가 결단의 순간이었다.

드디어 강동 부근에서 휴식하고 대기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간부들은 트럭을 가져오기 위해 평양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엿듣게 되었다. 나는 만일 트럭이 도착하게 되면 만주(滿洲)까지 가게 될 것임이 틀림이 없고, 탈출의 기회는 영원히 없어질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전부터 약간 안면이 있는 소총부대 병사에게 가까이 가서 총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으니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더니 지루하던 차에 잘 됐다 하면서 미제 칼빈소총 사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더니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총을 나에게 맡겼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탈출을 시도했다. 시간은 저녁 10시경이었고, 날씨는 잔뜩 구름이 끼어 있어서 캄캄하였기에 탈출하기에는 그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철저한 반공정신을 가졌고, 23살의 젊은 나이였기에 탈출할 용기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주저 없이 산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한참 뛰다보니 누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뒤돌아보았더니 서울에서 같이 온 의사 두 분이 따라오고 있었다. 약 500미터쯤 달리다보니 부락이 보였으며, 개 짖는 소리가 나서 우리들은 부락을 피해가면서 산봉우리에 올랐다.

얇은 하복 회색바지와 흰색 상의, 실탄 여섯 발이 든 칼빈총과 주머니에 든 약간의 돈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약 200미터 높이의 산봉우리에 도착하여 엎드려서 살펴보니 아무도 뒤따라오는 기미가 없었다. 아마 자기들도 도망가기에 바빠서 수색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지리를 전혀 모르니 방향을 정하기가 힘들었다. 구름이 지나간 자리에 하늘의 별이 보이기 시작하자 비로소 방향을 알 수 있었으며, 내려다보이는 도로를 통해 후퇴하는 북한군 트럭 행렬 불빛도 볼 수 있었다.

새벽쯤 되어 하산을 결심하고 산의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와 약 50호 정도의 작은 마을에 도착하였다. 길가에 있는 집에 들어가서 쉬어갈수 있느냐고 했더니 방 하나를 내주었는데, 그다지 빈곤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우선 우리들은 북한군의 사복 특수부대 요원 행세를 하면서 아침식사를 청해먹고 40대쯤으로 보이는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인의 신분을 탐색하기 시작했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었지만 육감으로 빨갱이 같지는 않아 총은 옆에 놓아둔 채 사실대로 우리들은 이남에서 강제로 끌려온 의사들이라고 말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그 주인은 공산당이 싫어서 그랬는지, 또는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서 공산당이 패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산당원들이 동네 목사 한분을 사살하고 북쪽으로 도망갔다는 말을 하면서 자기는 공산당에게 많은 피해를 본 사람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