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동란 발발(4회)

초저녁 어둠속에서 행진은 계속되어 인사동 입구에 있는 인민위원회 서울시 지부 건물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 순간 미군 헌병들이 들이닥쳐서 공포탄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내 옆에 서있던 친구가 두부에 파편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 주저앉았다.

즉각 그 친구를 업고 인근 의원으로 갔는데, 다행히 중상은 아니었기에 부상자를 남겨두고 다시 인사동 입구로 갔더니 시위대들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음날 신문을 보니 광화문에서 서대문으로 가는 중간지점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좌익단체인 학병동맹(學兵同盟)의 기습을 받아 많은 부상자를 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이 있었다.

2차대전 후 미국의 정보요원들이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안일하게 대처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우리나라도 공산화의 위기 속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위험한 시기에 몸은 던져 반공에 앞장섰던 분들, 그리고 6.25동란 때 나라를 지키다 희생된 분들에 대한 우리사회의 평가에 대해 나는 불만스럽게 생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드디어 1950년 5월 12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그 당시 유일한 상이었던 박열장학상 수상자로 졸업하고 한 사람의 의사가 되었다. 그 당시 인턴이나 레지던트 제도는 없었지만 전문과목을 선택해서 4~5년간의 훈련을 받아야 전문의사가 될 수 있었다.

내과와 외과에 지원자가 많았는데, 내과의 김동익 교수의 강한 권유가 있었지만 외과에 대한 매력과 김시창 교수에 대한 친근감에서 외과를 지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나는 사계절 중에서도 희망찬 신록의 5월을 가장 좋아했는데, 1950년의 화창한 5월에 졸업장을 손에 쥐고 서울대병원에서 젋은 외과의사로 출발하게 되었으니, 정말 나의 인생에서 희망과 기대가 가득 찬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도 잠시였을 뿐, 전혀 예기치 않았던 역사의 소용돌이가 전개됨에 따라 나의 분홍빛 꿈은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5월 12일에 졸업을 한 후 불과 한 달 만에 6.25가 터졌던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 생사의 기로에서

1950년 6월 25일 아침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요일이었다. 다소 구름이 끼고 찌뿌드드한 날씨였지만, 6월의 서울 거리는 아름다웠다. 아침 8시경 대한학생유도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동자동 자택을 방문했다. 다가오는 선수권대회 준비에 관한 보고를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38선에 긴급사태가 발생하여 육군본무에 갔다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당직근무를 하기 위해 서울대학 병원으로 갔다.

그때만 하더라도 전쟁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여 입원환자에 대한 회진을 끝마치고 당직실로 돌아오니 오전 11시경이었는데, 38선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며 북한군이 전면적인 전쟁을 개시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일제시대에도 전쟁에 나가보지 않았던 나는 전쟁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다음날 병원당국으로부터 전원 퇴원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보니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전방에서 후송되어 오는 전상환자를 치료할 준비를 준비하면서 외과가 다른 어느 과보다도 바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서울에 입성하는 북한군과 만세를 부르며 환영하는 시민들

부상 환자가 속속 후송되어 오니 전쟁을 실감하게 되고 나는 주야를 가리지 않고 근무하게 되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지 겨우 1개월밖에 되지 않는 처지라 환자 치료에 크게 도움이 될 리가 없었으며, 그저 수술 조수로서 간단한 임무를 수행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이틀이 지나니 북쪽에서 포성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피난민이 서울로 몰려온다는 소식도 듣게 되어 사태의 심각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지만 미군이 개입하게 되면 곧 수습이 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이 되나 북한군의 전차가 미아리까지 왔다는 소문이 나돌고 이북출신 학생들이 결사대를 조직, 자진해서 전선을 향해 떠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연일 근무에 피곤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족들이 궁금해서 북한군의 서울 침입이 임박할 무련 외출허가를 받아 후암동 집으로 돌아왔다. 사태가 절망적인 만큼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겠다고 판단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육성방송을 통해 서울을 사수할 것이고 미군이 곧 도착할 것이니 안심하고 각자 자기 자리를 지키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듣고 경거망동하다가는 오히려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물쭈물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한강다리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피난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 만일 온 가족이 과감하게 피난길에 나섰더라면 부친도 납치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애통하기 그지없다.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온 후 비오는 밤길을 걸어서 온 가족이 동대문에 있는 친척집으로 임시 피신을 했다. 다음날 아침, 궁금한 나머지 서울대 병원 외과에 전화를 했더니 모든 의사는 모두 집합하라는 전갈이 왔다. 이에 불응하는 사람은 가족까지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공포에 떨며 다음날 아침 병원에 가보니 정말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거리에는 북한군의 전차와 병사가 곳곳에 보였고, 병원은 북한군 환자와 완장을 찬 공산주의자들이 차지 하고 있었다. 또 학교 시설에 몇 년 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던 학우들이 공산당의 간부가 되어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귓속말로 우리 국군환자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당시 병원에 있었던 의사와 간호사들은 지하실에 감금해놓고 국군환자들은 뒷산으로 데리고 가서 총살하여 집단매장 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수개월 동안 서울대병원 일대, 특히 명륜동 쪽에서 악취가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선이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자 서울대병원은 북한군 병원으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대부분의 의사와 간호사, 기사 그리고 병원 종사자들은 공포와 실의 속에서 북한군의 지시에 따라 로봇처럼 행동해야 했으며, 일부 공산주의자들과 동조세력들만이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녔다.

전투가 치열해지고 부상자가 증가함에 따라 의사가 부족하게 되니까 대학병원 의사들에게 동원령이 내려서 전선에 차출되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상적으로 그들이 믿지 못했던 이북 출신 의사 두 사람과 나를 38선 북쪽에 있는 강원도 평강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들을 전방으로 보내게 되면 도망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도망갈 생각도 여러번 했었으나 마땅하게 갈 곳어 없었을 뿐 아니라 가족에게 가해질 비인도적인 처벌 때문에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리를 데리러 온 북한 출신의 원장은 전쟁으로 인해 급히 징발된 시골의사 같아 보이는 분으로 성격이 온순하고 독한 공산주의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군 병원의 원장까지 맡게 되었으니 공산당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었을 것이지만 사상적인 의사표시는 전혀 없었다. 열차가 떠나기 전에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하도록 허락해주는 것만 보더라도 그 사람의 성품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