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의 혼란기 속에서 공부다운 공부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예과를 졸업하고 의과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예과시절의 친구들 중에는 훗날 우리나라 각계에서 활약한 저명한 인사들이 많이 있다. 관계에서는 김기형 전 과학기술처장관, 의학계에서는 백낙원 인제대 총장, 재계에서는 김상하 상공회의소 회장, 학계에서는 고 이해영 문리대학장, 이상수 공학박사, 법조계에서는 김흥한 변호사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946년에 본과에 진학하기는 했으나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문 연마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학교는 국대안(國大案) 반대를 둘러싸고 좌우투쟁의 대결장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 있는 여러 개의 관립대학과 전문학교를 합쳐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종합대학을 만들겠다는 미국당국의 구상이 실천에 옮겨지는 과정에서 학생 일부가 반대운동을 했는데, 이들은 외부의 과격세력과도 연대가 되어 있었다. 반대의 명분도 전혀 없었을 뿐더러 지금에 와서 돌이켜볼 때 그 당시 서울대학교를 발족시킨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인간사회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시류에 아부하고 위선적인 사람들에 의해 대세가 되는 수가 있지만, 그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군중심리에 의해 경거망동하던 모습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매일같이 학생회 총회가 열리고 똑같은 문제들에 대해 토론이 거듭되었지만, 표 대결에서는 항상 우익, 반공세력들이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 당시 우익세력들을 가장 용기 있게 잘 대변한 분들 중에 기억나는 선배는 국립의료원장 등의 요직을 지낸 박현무 박사이다. 그 당시는 좌익적인 사과와 행동을 해야 지성적으로 보이고 인기가 있었으며, 우익적인 행동이나 언사를 하는 사람들은 반동으로 몰리던 시대였다.
나는 나이가 가장 어리면서도 본과 4년동안 총대(總代)를 맡아 반의 심부름을 맡아 했는데, 다행히 우리 동기를 사이에서는 좌우의 갈등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학교가 어수선하다보니 휴강이 다반사여서 총대가 할 일은 휴강시간을 한데 묶어서 시간을 되도록 활용하는 일과 시험을 쉽게 치를 수 있도록 교수들에게 교섭하는 일이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교수 중의 한 분이었던 외과의 김시창 교수(6.25 때 납북)는 매우 정확하고 엄격하신 분이었는데, 김 교수님께서 시험문제를 강의한 내용 중에서만 출제해주기를 바라는 학생 전체의 희망사항을 전달한 일도 있었다.
그때 김 교수님은 학교에서 듣는 강의는 의사가 필요로 하는 지식의 일부일 뿐인데, 의대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었을 때, 강의 때 배우지 않은 병을 가진 환자가 찾아오면 배우지 않아서 못 고치겠다고 대답할 것이냐고 하시며 크게 야단을 치셨다. 그때 나는 속으로 참으로 멋있는 분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그 선생님이 과장으로 계신 외과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내가 연세대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학생들에게 비교적 엄격하게 대한 것은 그때 김 교수님의 교육철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당시는 휴강도 많았지만 결석률도 높았으며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고 적당히 시간만 보내고도 졸업을 할 수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정치운동에 열을 올리거나 예술활동에 거의 전념하는 학생도 있어 신문 볼 시간도 없을 정도의 힘든 교과과정을 밟고 있는 오늘날의 의학교육과는 대조를 이룬다.
졸업시험 때 구두시험을 하는 교수도 있었는데, 김시창 교수는 어떤 학생이 하나도 대답을 하지 못하자 답답하고 화가 나서 심장이 어느 쪽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학생이 당황한 나머지 우측이라고 대답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사회가 혼란하다보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과교육대학까지 이렇게 파괴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체험을 통해 배운 것이다.
1946년 초, 온 가족이 아름다운 고향 강구를 떠나 서울로 이사 와서 용산구 후암동에 안주하게 됨으로써 국민학교 때 시작된 나의 하숙생활과 기숙사생활도 끝나게 되었다.
또 중학교 시절에 열중했던 유도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소공동에 위치한 연무관에서 각 대학 유도인들이 모여 학생유도연맹(學生柔道聯盟)을 조직했다. 전국에 흩어져있던 학생유도를 조직화하여 합동 연습도 하고 전국선수권대회도 개최했다.
그 당시 서울상대의 이남수 씨, 치대의 오응서 씨, 고려대의 윤시병 씨 등이 주축을 이루었고, 후원자로서는 유도계의 선배인 장경순(전 국회부의장) 씨, 조수하(전 대한통운 사장) 씨, 최영희(전 국방장관) 씨 등이 많은 뒷받침을 해주었으며, 김성곤(전 공화당 중진) 씨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기도 했다.
나는 승단시험에서 3단이 되었고, 2대 학생유도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순박하고 신의있는 유도친구들과 소공동 도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이 활동은 대학시절에 가장 추억에 남은 일들 중에 하나로 기억된다. 유도의 세계에서는 사상적인 대립은 없었지만, 대체로 온건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 무렵 좌익활동이 점차 과격과 폭력으로 흐름에 따라 이철승 씨가 주도하는 학생반탁운동(學生反託運動)에 마음속으로 공감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잠시나마 그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1946년 겨울, 소공동에서 학생유도연맹 선발대회를 마치고 유도친구들과 함께 경동교회에서 열리고 있는 반착학생대회에 참가했던 것이다.
반탁학생조직과 유도연맹이 공적으로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심전심으로 이 운동을 도와주고 싶은 분들이 많았던 것이다. 유도선수들은 체구가 커서 남의 눈에 잘 띄었기에 좌익세력의 폭력적 태도에 대해 약간이라도 시위효과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구국과 반공의 열기가 충만한 가운데 대회가 끝난 후, 정동에 있던 소련영사관 앞까지 평화적인 시위를 끝마치고 나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해산하지 않고 그 길로 을지로 2가에 있던 인민일보사를 습격하여 인쇄시설을 파괴했다.
정치폭력을 찬양할만한 방법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좌익극렬세력과의 투쟁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하지 않고는 그 세력의 비인간성과 잔인성에 대항할 길이 없어보여서 우리들도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