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대 예과 진학과 해방 (2회)

그 당시 중학교 과정은 5년제였지만, 대학입시는 4학년 때부터 치를 수가 있었다. 법과를 전공해서 법관이나 변호사가 되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는데, 그쪽으로 지원하여 합격을 하더라도 학병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결국은 육사에 가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학교 당국에 5학년이 되어 육사에 가게 되더라도 우선 연습 겸 실력 테스트를 한번 해보겠다는 구실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시험을 쳐보겠다고 말 하여 추천장을 얻을 수가 있었다.

당시에는 이공과나 화학과에 가면 학병을 면할 수가 있었기에 나는 별 준비도 없이 시험을 치른 것이다. 즉, 장래의 직업 선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선 육사지원을 피해놓고 보자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공과(理工科)를 지망할 경우에는 선택과목이 화학과 물리였고, 의과(醫科)는 생물이었는데, 생물이 화학보다 좀더 쉬울 것이라고 여긴 것이 내가 의과를 선택하게 된 이유였다.

우리 집안에는 의사가 한 사람도 없었고, 또 나 자신이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의사라는 전문직업을 전쟁이라는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훗날 내가 셰게의사회장까지 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사람의 운명은 모르는 일이 많다고 하겠다.

뜻밖에도 내가 대학 예과에 입학하게 되어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시작했는데,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와 대화가 여의치 않아 당할 때가 많았던 기억이 난다.

일제 군국주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예과 생활의 분위기는 중학교 시절에 비교하면 퍽 자유스러웠다. 군국주의 냄새가 나는 일은 비교적 적었으며, 교수들도 자유주의자 같은 냄새가 났고, 당시 청량리에 있던 교정은 자유로운 학문의 전당이었다.

의과대학을 위한 예과 과정이었으나 자연과학 분야보다는 문학, 철학, 외국어 같은 문과쪽 내용이 많아서 즐거웠다. 나는 외국, 특히 유럽 여러 나라의 문학서적을 탐독하면서 자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전황이 점차 나빠지자 2학년 때인 1944년~45녀에는 학생근로동원이 시행되어 2학 년 때 학생전체가 함경남도 흥남시에 파견되어 노무자 숙소에 기거하면서 알루미늄 제조에 종사하게 되었다.

나는 펌프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탱크의 물이 넘쳐흘러 바닥이 물에 잠겼을 때 기계를 조작하다가 감전되어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공부는 생각지도 못했고, 매일이 우울하고 피곤한 나날이었으나, 일요일만은 학우들과 함께 바닷가에 나가 아름답게 핀 동백꽃을 바라보면서 산책을 할 수가 있었다.

전쟁이 어떻게 되어가는 지 상황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동경제대 졸업 후 독일유학까지 마친 젊은 일본인 독어 교수가 지나가는 말처럼 영어공부를 좀 해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나는 종전과 해방이 가까워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와서야 그때 그 말이 그 젊은 교수의 민족을 초월한 제자들에 대한 애정의 표시였음을 알게 되었고, 그 깊은 뜻에 아직도 경의를 표하고 있다.

▲ 해방을 맞아 국민들이 기뻐하며 플랜카드 행진을 벌이고 있다. [출처 ; 독립기념관]

드디어 감격의 8.15해방이 닥쳐왔다. 흥남에 있는 노무자 속소에서 종전을 알리는 뉴스를 듣는 순간 한국인과 일본인의 태도는 당연히 큰 대조를 이루었으며, 그 시점에서는 쌍방에 공통점이 있을 수가 없었다.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하루빨리 서울로 되돌아가는 일일 것이다. 다행히 학교당국의 빠른 대응으로 1주일 이내에 화물열차편으로 편안하게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이 느껴져서 나는 귀향했다.

9월 초에 미군부대가 동해안을 따라 진주하기 시작했고, 강구에도 1개 분대가 장기 주둔하게 되었다. 그 부대에서 통역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영어도 배울 겸 해서 지원했더니, 퍽 환영해 주었으며, 짧은 영어 실력이었지만 통역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영덕에서도 좌우세력의 충돌이 있었는데, 좌익세력이 강세로 등장하면서 미군의 동태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고 있었다. 그곳에 주둔한 미군들은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는 인디애나주 농촌 출신의 순진한 젋은 청년들로서 참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 후로 미국에 갈 때마다 그때 그 병사들이 자랑하던 자동차 경주로 이름난 인디애나 폴리스를 한번 방문하고 싶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90년에야 겨우 릴리제약 회사의 초청으로 그곳을 방문할 수 있었고, 그때 다시금 8.15 해방 후에 만났던 인디애나에서 온 소박한 젊은이들 생각이 나서 친근감을 느꼈었다.

1945년 가을이 가까워져서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학교는 교수진을 새롭게 구성한 후 경성대학(京城大學) 예과(豫科)로 명칭을 바꾸고 다시 문을 열었다.

서울에 올라온 나는, 온 천지에 정치바람이 불고 전 시민이 모두 정치가가 된 듯 한 느낌을 받았다. 36년만에 회복한 주권과, 좌우의 대립이 첨예화함에 따라 곳곳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각종 데모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었다. 너무나 지나친 정치열기는 나로 하여금 식상하게 할 정도였지만 잘못하면 공산화가 될 우려가 있었던 시절이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무렵 나에게는 또 한 차례 인생의 기로에 서서 중대한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가 발생했다. 전쟁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학과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학과 변경의 길이 트인 것이다.

미국 군정관이 총장이 되었으니, 미국식으로 보면 학과변경이 허용되는 것이 당연했다. 주로 의예과에서 문리대, 법대 쪽으로 전과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원래부터 법과나 정치학과 쪽을 염두에 두었던 나에게도 그 계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부친께서는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고, 안정된 생활이 보장된 의사라는 전문직도 좋지만 정치를 통해서 큰일을 하기를 열망하셨고, 조부님도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온 세상이 정치판으로 변하여 모든 사람이 정치에만 열중해서 싸우는 풍조가 우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학이 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길이며, 한 사람의 인간이 보다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인생을 마칠 수 있는 일터라고 생각되었기에 의학의 길을 추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특히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듯한 가정형편이었기에 의사로서 더욱 효과적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정치학과 전과를 포기하고 의학을 계속 하기로 했다. 그러던 내가 후일 정치인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