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사생활을 통해 인술(仁術)이라는 개념이 너무 편리하고 쉽고 아무 때나 통용되고 있음에 당혹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의사가 사회의 다른 직업과는 다른 차원의 윤리규범 위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동서를 통해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기업가들이 향유하고 있는 이익추구의 권리도 의료에서는 제한되고 있으며, 의료의 성과는 기업과는 달리 이익 추구에 있지 않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하고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가에 의해서 평가된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이런 윤리관 위에서 봉사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무료로 남에게 봉사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든 일이지만 의사들은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매일같이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료인들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의 특수성이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인술이 해석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필자의 입장에서는 의사는 무조건 환자를 위해 봉사해야 하며 돈이나 시간 등을 초월해야 한다는 견지에서도 인술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인술이라는 용어는 의사를 칭찬할 때보다는 비난할 때 더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의사로서의 사회적인 특권을 바라지도 않고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고 있던 나로서는 인술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면서 일방적으로 의사 전체를 비난하는 신문기사를 읽을 때마다 불쾌한 심기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이런 불편한 감정은 미국사회에서는 느껴ㅛ보지 못했던 일이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 후 어떤 일간지에 짤막한 칼럼을 쓴 일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날 안국병원에서 일을 끝마치고 초저녁에 차를 타고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이 길이 일방통행인 것을 운전기사가 모르고 있었다. 양쪽에서 교통순경이 달려오면서 정지를 지시했다. 한 순경은 나를 국회의원으로 알고 있었고, 다른 순경은 안국병원 원장인 의사로서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기사가 미안하다면서 실수를 자인하니까, 나를 전자로 알고 있던 순경은 경례를 하면서 보내주고자 했지만, 후자로 알고 있던 교통경찰은 딱지를 뗄 태세였다. 그래서 나는 두 명의 순경에게 국회의원은 이 시간에 그다지 급한 일이 있을 리가 없으니 교통법규 위반으로 적발되어야 하지만 의사는 응급환자를 보러가는 급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정상참작도 할 수 있는데, 일이 거꾸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순경들은 납득은 하면서도 “어디 우리나라의 사정이 그렇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자동차에 의사라는 표시가 있으면 주차위반 등 교통법규를 위반했을 때, 이유를 들어보고 정상참작을 해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인술이라는 용어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여지고 있는데 비해 의사에 대한 사회적 인정도나 이해도가 그다지 높은 것 같지는 않다.
나는 환자와 환자가족들과의 대화에 상당한 비중을 두면서 일해 왔다. 그들과의 대화 가운데는 인생과 사회, 그리고 의학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내용들이 많다. 한번은 소뇌종양(小腦腫瘍)으로 간단한 어린이를 수술하기 위해 시골농부 같아 보이는 아버지에게 설명을 하게 되었다.
비용문제에 이르자 그는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가족과 상의해보겠다면서 진찰실에서 나갔다 들어오더니, 자기집 형편은 부인과 아들 넷이 있는데, 재산은 집과 황소 한 마리뿐이고, 소작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진료비를 감당하려면 소를 팔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고, 가족이 먹고 살수 없게 되므로 부득이 수술을 포기하고 퇴원시켜야 되겠다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나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학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나의 작은 월급은 수술환자의 수혈에 필요한 혈액값을 물어주거나 입원환자의 보증을 서는데 사용되기 일쑤여서 월급날이라는 것이 나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사회사업과나 선교사들에게 치료비 지원을 간청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이때의 농부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훗날 내가 정치에 투신하여 의료보험제도(醫療保險制度)를 추진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60년 초,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내가 미국에서 어렵게 배워온 지식과 기술을 환자에게 적용하는 과정에서 경제적 이유 때문에 많은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니 참으로 고통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중국인 환자를 수술한 것이 소문이 나서 비교적 많은 중국인들을 돌보게 되었다. 1960년대 초에 9세 정도 된 중국인 어린이를 진찰하게 되었는데, 뇌종양으로 판정되었다. 환자 부친에게 설명해주었더니 “지금 9살인데 수술을 해서 3년을 더 산다하더라도 11살까지 밖에 못 사는데 수술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것이었다.
의학의 목적이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암에 대한 치료약이 전혀 없는 상태였음에 비추어볼 때 중국인의 그 대답 가운데는 우리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이 솔직하게 담겨져 있었다.
3년간의 생명연장을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과 환자와 가족들의 심한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수술도 어린이에게서 볼 수 있는 뇌수종, 척수수종같이 수술 후에 심한 후유증이 예상되는 질환을 대할 때는 몸이 성한 사라도 세상풍파 때문에 살아나기 어려우운데, 장애인에 대한 대책이 거의 없다시피 한 우리 사회에서 이런 환자들이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니 나에게는 정신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강의 시간에 의학의 한계라는 말을 많이 했으며, 의사가 겸손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런 시각에서 설명하기도 했다. 훗날 보사부장관 시절 장애자 등록사업을 시작할 때나 입법 추진을 할 때에도 나의 의사로서의, 경험이 깊은 관심과 정열을 기울이게 했다고 믿고 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의 처음 1년 동안은 하루 12시간 또는 14시간 이상 일에ㅐ 매달려 미국에서의 수련의시절만큼이나 바빴기에 취미생활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쉬는 날은 잠자는데 거의 소모했다. 야간에는 통행금지가 있어서 응급실이 비교적 한산했지만 응급환자가 들어오거나 입원환자 상태가 나쁠 때에는 서슴지 않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대처했고, 해결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어느덧 나이가 30세를 넘게 되니 결혼문제가 대두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친께서는 조급하게 생각하시면서 약간의 압력을 가하기도 하셨다. 그래서 누이동생 인자(寅子)의 소개로 이화여자대학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조교로 근무하고 있던 조인섭 씨의 3녀 영부와 교제하게 되어 청혼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나는 털털이 지프차를 타고 다녔는데, 세브란스병원에서 일과가 끝나고 만나 저녁식사를 한 후 명륜동에 있는 집까지 데려다 주고 후암동으로 돌아오면 통행금지 시간 직전이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다시 6시부터 움직여야 하니 즐겁기는 했지만, 너무나 피곤해서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다.
만난지 1개월 만에 약혼하고 다시 1개월 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남대문교회가 수리 중이서 새문안교회에서 강신명 목사님의 주례로 식을 올렸다. 학생들까지 결혼식에 참석하여 축하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결혼식날 아침에도 병원에 나가 회진을 한 후에 식장으로 갔으며, 신혼여행도 온양에 가서 2박만 하고 돌아왔으니, 환자들에 대한 챔임으로 얼마나 바빴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생활도 원만하여 1남 2녀(영주, 영호, 희주)를 얻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