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학을 하면서 군대에 간 고등학교 친구의 어머니를 봉양하며 삼양동 난민주택에서 고려대학까지 걸어 다녔다.
자유당 정권은 고려대가 정부에 비협조적이고 반정부 데모를 잘 하여 고려대 앞 도로는 포장도 해주지 않아 비만 오면 도로가 완전히 진창이 된다. 차가 지나가면서 흙탕물을 튀기면 그대로 뒤집어 써야 했다. 진흙을 흠뻑 뒤집어쓰고 와서 학교의 화장실에서 씻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등하교 길에 항상 걸으면서 <삼위일체>라는 영어책을 보며 영어 단어를 암기하였다. 그 당시는 서울의 인구가 적어 걸으면서 책을 보기가 용이했다.
학비마련으로 어려웠던 나날
나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 세 명을 교동초등학교 6학년인 김철환 군의 집에 입주하여 가르쳤다. 철환이의 큰 형은 서울 상대에 재학 중이고 두 형은 모두 경기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며, 누나는 경기여고 재학 중 정신질환으로 요양소에 있었다. 온 가족이 숭동교회에 다니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철환이는 이 집 막내로 귀염둥이다. 마음이 여리고 착하며 내가 제 매형이 되기를 은근히 간청하기도 하였다. 철환이는 경복중, 여학생 둘은 이화여중과 숙명여중에 진학하였다.
나의 첫 가정교사는 그런대로 좋은 성과를 거두어 숭동교회에 소문이 나게 되었다. 나는 중학생이 된 철환이를 도우며 일찍 귀가하는 초등학교 저학년을 가르쳐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철환이 엄마의 주선으로 등록금을 선불로 받고 초등학교 4학년을 가르치게 되었다. 숙식에 걱정이 없고 등록금을 내고 나면 나는 탄탄대로였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까지 술 담배를 안 하는 기독교신자였다.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국문과 동기인 이중호는 담배연기를 내 얼굴에 품어내며 “야, 예수쟁이야. 담배연기가 구수하지.”하며 나를 놀려대곤 하였다.
숭동교회 새벽기도회에 가서 내가 기도를 인도했다. 기도가 끝난 후 교우들은 “선생님, 어떻게 기도였는지 생각나세요?” 나는 무슨 내용을 어떻게 기도하였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났다. “선생님의 기도는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어요. 성령의 말씀이었어요. 크게 감동받았어요.” 그러던 내가 어쩌다 세속에 물들어 애연가, 애주가가 되었을까.......
여름방학에 휴가를 얻어 철환이를 데리고 고향에 갔다. 4.19 후 국회의원 재선거가 있어 나는 고향에 출마한 신각휴 후보의 연사로 선거를 도왔다. 신 의원은 당선이 되었다. 그런데 철환이 엄마로부터 “급히 상경요망”이라는 전보를 받고 급히 상경하였다.
누가 뜻하였으랴! 선불로 등록금을 주던 집이 사업에 망하여 멀리 변두리로 이사를 가게 되어 2학기 등록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청천날벼락이었다. 등록금을 마련하려면 도둑질을 하거나 아니면 은행강도 질을 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물건을 사서 팔아야겠는데, 밑천도 없다. 친구들을 찾아갔으나 모두 가난뱅이이니, 이런 저런 얘기나 하고 돈을 융통해달라고 차마 말문을 못 열고 돌아섰다. 온 천지가 캄캄한 암흑이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나는 세상이 싫었다.
나는 광화문에서 종각을 거쳐 종로2가 도로 한가운데로 걸었다. .지나는 기사들의 빵빵대는 경적소리가 요란하다.
“야, 이 미친놈아, 뒈지고 싶어!”
기사들이 퍼붓는 욕설이 귓가에 스친다.
‘....... 그래 죽고 싶어 환장했다. 즉사하도록 치기나 해라......’
인명은 재천이라더니 죽기도 어렵다. 종로2가 천도제약 앞을 지나다가 친구가 생각났다.
충북 음성 출신인 반재식은 천도제약(약 도매상)에 근무하며 소매를 하는 약방에 주문을 받아 자전거로 배달하던 친구이다. 내가 고등학생으로 약방 점원으로 있을 때 사귄 친구다. 그 친구는 성균관대 야간에 진학했고, 아직도 천도제약에 근무하고 있다. 친구의 자취방을 찾아가서 나의 딱한 사정을 말했다.
“김형! 2만환 있으면 자신 있습니까?”
“그럼 어쩌겠어요. 최선을 다해보아야지요.”
수첩을 꺼내더니
“오늘 마침 월급을 탔어요.”
월급봉투에서 2만환을 준다.
1965년 여름방학이 65일밖에 남지 않았다. 급박한 상황이다. 시간이 없다. 객지에 나가면 숙박이 어렵고, 가짜 고학생도 있어 학생증만으로는 신분보장이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현승종 학생처장을 또 찾아갔다.
어려운 일만 가지고 찾아뵙는 것이 송구스러웠으나 체면 차릴 때가 아니었다. 나는 처장님에게 고학생임을 증명할 소개장을 부탁하였다. 담당직원을 불러 이런 관행이 있었는지 확인하시고
“이를 어쩌지. 그런 증명서를 발행한 적이 없는데. 학과장님과 상의해보게.”
나는 학교 앞에 사시는 구자균 학과장님 댁을 찾아갔다. 사정을 듣더니 곧 명함 뒤에다가
“이 학생은 고려대 국문과 2학년으로 학비를 벌러 공부하려 하오니 선처바랍니다. 고려대학교 국문과 학과장 구자균.”이라고 써주었다. 이 명함은 나의 고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 이런 자료를 다 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구자균 교수님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개설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고려대 국문과의 대부이시다. 경성제대를 졸업하시고 대구사범에서 전 대통령 박정희의 담임도 하였다. 교수라기보다 인자한 아버지였다.
5.16 쿠데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 씨가 구자균 선생님을 뵈러 왔었다고 한다. 많은 조언을 듣고 싶어 찾아갔겠지. 그러나 선생님은
“이놈아! 군인이 나라를 지킬 것이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해. 고얀 놈!”
조언은커녕 꾸중만 들었다고 한다.
한번은 범죄를 저지르고 쫓기는 제자를 선생님 댁에 숨겨주었다. 범인 은익죄로 경찰에 소환되었다.
“여보, 제자가 죄를 짓고 찾아왔는데, 어찌 내치겠소.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쫓아낼 수있소? 내가 잘못 가르친 것이니 나를 구속하시오. 앞으로도 그런 제자가 찾아오면 역시 숨겨주겠소.”
역시 아버지 같은 스승님의 올바른 자세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