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형의 영웅적 과시는 형의 친구들이 오면 더 심하였다. 당신의 위상을 과시하느라고 세 동생에게 ‘세이샤!’ 하면 우리는 질서정연하게 무릎을 착 꿇었다. 이것은 마치 군대의 제식훈련을 연상케 한다. 나는 막내라 두 형을 따라 명령에 움직이기가 지겹게 싫었고, 맏형이 미웠다.
우리는 아침에도 잡곡에 멀건 시래기죽을 끓였다. 그것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양인데, 먹기 전에 세 동생들은 맏형에게 두숟깔씩 떠서 바쳐야만 했다. 이것을 불이행 했다가는 매를 맞거나 엄동설한에 눈 위 700m 정도의 길을 맨발로 돌아오게 했다.
나는 어려서도 고집이 세였던 모양이다. 때로 맏형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은 죄로 맨발로 눈물이 범벅이 되어 엉엉 울며 눈 위를 달려야만 했다. “하나님!” 저를 빨리 자라게 하여 형보다 힘이 세게 하여 주십시오. 형을 때려주겠습니다.“하고 하늘에 울부짖었다.
둘째, 셋째 형은 나의 언 발을 문지르며 안타까워 눈물이 그렁그렁 하였다. 그러나 맏형에게 한마디의 불평도 못하였다. 이 형들은 둘 다 마음이 착하고 끔찍이 나를 귀여워했다.
맏형은 나의 험난한 인생역정을 미리 아시고 나를 강하게 훈련시킨 것일까? 그렇다면 맏형의 선견지명에 고마워해야지, 원망한 것을 잘못이었을까? 돌이켜보면 역경을 극복할 강인한 힘이 어려서부터 길러진 것 같다.
일제시대에는 산이 우거져 뒷산에 가면 상수리열매(굴밤-도토리)가 많이 열렸다. 어른들이 떡메로 나무를 때리면 굴밤이 소나기 오듯이 떨어졌다. 나는 어리고 힘이 없어 떡메질을 할수 없기 때문에 망치를 가지고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때려 떨어뜨리고 내려와 굴밤을 주웠다.
이것의 껍질을 까고 물에 불려 떫은 맛을 제거한 후 분말로 만들어 도토리묵을 만들어 먹으면 참으로 꿀맛이었다. 그러나 도토리묵으로 만들기에는 많은 수공이 들었다. 굴밤을 까서 물에 불려 잡곡밥에 그대로 섞은 것을 떫고 맛이 없어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배는 고팠지만 엄마 몰래 떫은 굴밤을 골라내어 마루 밑에 버렸다. 후에 발각되어 엄마에게 심한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여름이면 상추쌈에 된장만으로 점심을 때웠고, 겨울에는 고구마 몇 개로 점심을 때웠으며, 등겨로 밀개떡을 만들어 먹는가하면, 술찌꺼기로 죽을 쑤어 먹기도 하였다. 아침과 저녁은 우거지죽과 콩나물죽으로 연명하게 되어 나는 지금도 죽을 싫어한다.
일제시대에는 만주에서 생산된 콩의 기름을 짜고 남은 콩깻묵을 배급으로 받았다. 콩깻묵은 사료나 기름으로 쓰는 것인데, 일본 놈들은 조선사람의 먹거리로 주는 것이다. 쌀과 보리는 모두 공출하여 빼앗아가고, 콩깻묵을 면사무소에서 배급으로 주었다.
어떤 것이든지 배급을 받으려면 <황국신민맹서-고곡구신반노세이사>를 암기해야 한다. “고곡구식민노 이치, 와다내비도모와 다이입봉 데이곡구노 신민데아르마쓰 혹은 와레라와 고곡구신민나리 구세이못되 군곡구나호셍>이라고 한듯하다.
무학인 부녀자들이 그 문구를 암기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번 틀리면 맨 뒤쪽에 가서 다시 차례를 기다려야 하니 그 고역이 상상이 간다. 농사지은 것은 일본놈이 다 가져가고 사료에 쓸 것이나 주면서 생색을 냈으니, 이것이 나라 없는 슬픔이었다. 황국식민맹서와 의미도 모르며 일본말로 앵무새처럼 암기를 시키면 조선사람이 일본사람이 된단 말인가?
나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군북면 환평리)에 가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환평리는 뒷산에 봉화대가 있고, 그 옆에는 태종의 태를 모신 태실이 있는 경개가 좋은 명산 아래에 있다.
무엇보다도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좋고, 외사촌들과 개울에서 가재를 잡고, 개울가에 자라는 독초를 짓찧어 개울물에 풀면 물고기들이 그 물을 먹고는 비틀거릴 때 잡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금강 지류에서 목욕을 하고 다슬기를 잡는 것도 즐거웠다.
내가 일등병일 때 결혼을 하고 외할머니를 뵈려고 환평리에 갈 때 금강의 지류를 한복차림인 아내를 업어서 건넜다. 외할머니를 뵙고 곧 상경하려 했는데, 외할머니가 집안에 계시지 않았다. 알고 보니 다래끼를 메고 들에 가셨다고 한다.
마을 아래 들로 내려가니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고구마를 캐서 오시기에 “오늘 서울 가요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말하며 손짓 언어를 하였더니, “할미가 귀가 어두워 대화도 안 되니 가려느냐? 너희들 주려고 고구마를 캐왔는데......” 하시며 눈물을 닦으신다.
아내는 외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오늘 자고 가겠어요, 할머니.”하며 바쁜 일정을 미루고 삶을 고구마를 맛있게 먹고 이튿날 서울로 왔다.
외할머니의 부음을 받았을 때 칠순이 넘으신 어머니는 심한 감기를 앓고 계셨다. 의사에게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에 갈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의사는 “할머니의 친정 어머니요? 장수하셨네요.”하며 내가 동행하면 갈수 있다고 한다.
기차로 대전에 내려 환평리까지 택시로 모시려니 택시기사들은 눈이 많이 쌓여 갈수 없다고 한다. 1시간이 넘도록 오는 택시마다 사정을 말했으나 허사였다.
택시 한대가 오더니 “타세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한다. 이 택시 기사는 어느 택시도 갈수 없다고 판단하고 바퀴에 체인을 달고 다시 온 것이다. 하해와 같은 기사의 배려가 고마울 뿐이다. 눈 위 산길을 달릴 때 바퀴 아래서 돌이 핑핑 튀어나간다. 나는 택시의 문을 쉽게 열수 있게 하고 어머니를 오른 손으로 안고, 만일 경우 택시가 언덕 쪽으로 구르면 어머니를 안고 뛰어내리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무사히 도착하고 보니 긴장으로 온 몸이 땀에 흠뻑 베었다. 그래서 구순을 넘기신 외할머니의 장례에 참석하였다. 외할머니는 그 많은 손자 손녀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산이 우거져 상수리열매인 도토리, 산나물, 들나물, 야생버섯을 구하기가 쉬워 식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것도 없으면 소나무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속껍질을 벗겨 말려서 분말을 만들기도 하고, 칡뿌리를 캐어 쪼개서 말린 다음 떡메로 패어 가루를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그런데 칡도 암컷은 굵고 커서 가루가 많이 나온다. 수컷은 가늘고 가루가 적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