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주 김씨 판도판서공파 장암공손 계림자손(慶州 金氏 判圖判書公派 壯菴公孫 鷄林子孫) 24세손인 아버지 김문달(金文達), 어머니 이월선(李月仙)의 4남 5녀 중 아래 여동생이 하나 있는 8째로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난곡리 개미재에서 1937년 11월 7일(음력 8월 27일 : 公子 誕日)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는 곳은 옥천 시내에서 보은쪽(동쪽)으로 6km이상 떨어진 심심산골로 목사리, 개미재, 산골의 세 마을로 구성된 남곡리이다. 금강의 중유가 굽이쳐 흐르고 노승산, 오형제봉, 칠봉산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농촌이다.
할아버지는 3남 2녀를 둔 순박한 농부로 열심히 농사일을 하여 머슴을 둘씩 두고 쌀을 수레에 실어 장에 가서 팔아서 농토를 많이 장만하여 농촌의 부자로 살았으나, 자녀들의 교육은 초등학교가 고작이었다. 자식이 모자라면 부모의 재산을 지키지 못한다더니, 그 말이 증명되었다.
할아버지가 작고하시자 아버지는 도박에 탐닉하고 소실까지 두어 나에게는 배다른 1남 1녀가 있다. 백석꾼이었던 우리집은 내가 태어날 때는 철저히 망하여 알거지가 되었다. 어쩌면 그렇게 많은 전답을 다 팔아먹고 남은 것이라고는 자그마한 선산뿐이었다. 차마 부모가 묻힌 선산은 팔아먹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부자가 망하면 3년은 간다던데,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질 수가 있을까?
이런 형편에 태어났으니 낸들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울음[고고성呱呱聲]이나 크게 울었을까? 끼니를 못 잊는데 모유나 배불리 먹었을까?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생문이 활짝 열렸던 모양이다.
첫째와 둘째 누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출가하였고, 셋째 누나가 나를 업어 길렀다고 한다. 말도 못하는 어린 것을 업고, 내가 싫어하는 이웃집에 가려하면 등 뒤에서 누나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하니, 싫고 좋은 의사 표시를 분명히 했던 모양이다. 셋째 누나의 말에 의하면 어린 것이 아주 영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몹시 개구쟁이였고, 호기심이 많은 말썽꾸러기였다고 한다.
개미재에서 살골로 이사했다. 살골[杏村部落] 이라는 마을 이름은 살구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우리집에는 큰 살구나무가 있어 다가새가 둥지를 틀고, ‘다가다가’ 울면서 새끼에게 먹이를 연신 날라다 먹이곤 했다. 봄이면 온 마을이 살구꽃, 자두꽃, 봉숭아꽃으로 뒤덮여 무릉도원을 연상케 했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던 이호우의 시조가 연상되는 마을이다.
그런데 일정시대에 징용으로 남양군도에 끌려갔던 아버지께서 해방이 되어 귀국하셨다. 나는 해방 이전까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귀국할 때 옥천역에 마중 갔을 때 “저 분이 아버지이다”라고 형들이 일러주었다. 귀여운 막내를 오랜만에 보았으면 한번 안아 줄만도 한데...... 해방과 귀국의 기쁨으로 마중나온 사람들과 왁자지껄 담소만 나누신다.
아버지의 귀국 후에도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다. 아버지는 술 생각이 간절했던 모양이다. 그 살구나무를 몇 푼의 술값에 팔아먹은 것이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슬펐던지 아버지를 많이 원망하며, 나는 뒤꼍에서 혼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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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이 만개한 살구나무 [출처 ; 삼성] / 내 고향은 살골[杏村部落] 이라 불릴 정도로 살구나무가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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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가벗은 알몸으로 고추를 당당히 드러내고 빨빨거리며 잘도 돌아다녔다. 마을 뒤꼍의 말둑에서 땅벌이 연상 들락거리는 것이 신기하여 꼬쟁이로 쑤셔보았다. 땅벌이 무더기로 나와 알몸을 쏘고 물고 할퀴고 하니 어린애가 죽는다고 울 수밖에. 그 울음이 너머나 자지러져 이웃 어른이 뛰어와 보니 온몸이 벌로 덮여 있어, 옷을 벗어 뒤집어쓰고 나를 안고 집에 왔다고 한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벌독이 온몸에 퍼져 퉁퉁 부어 내 모습은 살찐 돼지모양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때 내가 죽는 줄 알았다고 회고하신다. 약이 없던 시절이라 온몸에 된장을 말라주는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하였다. 어려서 벌침을 받아서 그런지 영양실조에도 나는 건강하게 자랐다.
어머니는 베틀로 몸소 무명을 짜고 손수 바느질을 하여 자식들을 입혔다. 내복이나 트렁크(빤스)는 중학교 때까지 입어본 적이 없다. 겨울에는 무명바지저고리에 솜을 두어 입었다. 종이, 휴지, 손수건이 없던 시절이라, 코가 나오면 옷소매로 닦으니 옷소매가 코로 뻔질뻔질하게 되고, 이발을 못해 머리칼이 밤송이 같이 되었으니, 나의 초라한 그 꼴이 상상이 간다.
왜 그렇게 이는 많았는지, 겨울에 옷을 벗어 화롯불에 쪼이면 뜨거워서 이들이 섶 사이에서 모두 기어 나오는데, 이것들을 잡아서 화롯불에 넣었다. 이가 툭툭 터지면 이상야릇한 냄새가 났었다. 어쩌면 구수한 냄새라고나 할까.? 못 먹는 주제에 이와 빈대에게 피마저 빼앗기니 영양실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십 전짜리
나는 어려서 개구쟁이에다 별난 짓을 많이 했어도 귀엽게 생겼던 모양이다. 마을 어른들이 너무 귀여워서 응모를 팔라고 하니, 맏형이 50전 주면 판다고 하여 마을에서 ‘오십전짜리’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형들 중에 특히 맏형은 동생들에게 폭군으로 군림하였다. 명령불복종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어린 나를 우물에 계속 빠뜨려 물을 먹이다가 죽을 지경이면 꺼내곤 하였다. 장난인지 훈련인지 모르나 나는 고통스러웠다. 힘만 있으면 맏형에게 대항하고 싶었다. 물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고개룰 뒤로 젖히고 손과 발을 놀려 겨우 물위에 뜰 수 있었다.
마을 옆에 연못이 있었다. 마을 아이들은 여름이면 발가숭이로 이 연못에서 수영을 즐겼다. 여러 이웃 마을의 유일한 수영장이었다. 나는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이 연못에서 목을 뒤로 젖히고 팔다리를 늘려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지나가던 어른들은 너무 신기하여 “저 50전짜리 좀 봐.! 저 깊은 물에서 수영하잖아!” 놀람과 경탄의 소리가 들렸다.
이 연못은 겨울에는 마을 청소년들의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소나무를 쪼개어 다듬어 철사로 날을 하여 썰매를 만들고, 나무 막대에 철사를 박아 두 손에 잡고 얼음을 찍어 밀면 훌륭한 썰매가 되었고, 조금 자라서는 소나무를 쪼개어 다듬어 그 밑에 철사를 내고 그 옆에 못을 박아 새끼로 매어 발에 묶어 스케이트를 타곤 하였다.
소나무 스케이트가 한 단계 발전하여서는 대장간에서 스케이트 칼날을 만들어 나무에 박아 얼음 위를 날듯이 달리기도 하였다.
연못 주위에서 나무를 모아 모닥불을 만들어놓고 쬐어가며, 노는 것도 마냥 즐거웠다. 때로는 고구마를 구워먹다 보면 얼굴과 입이 새까맣게 되어 서로 바라보면서 깔깔대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