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사랑 (12회)

나의 첫사랑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연애하는 방법이 S남매를 맺는 것이었다. 다른 고장에서도 유행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친구의 조카뻘 되는 청자와 S남매를 맺고 인편에 연애편지를 주고 받았고, 사진도 교환했다.

우편으로 편지를 보냈다가 부모에게 발각되면 큰일이다. 사진으로 본 청자는 또랑또랑한 눈빛에 둥그스름한 얼굴로 참 예뻤다. 하루가 천년같이 기다리던 어느 토요일 용산면의 친구집에 갔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낮에는 만날 수가 없었다. 밤에 청자가 내가 있는 친구의 방에 숨어들었다.

청자와의 첫 만남이다. 그립던 청자를 만났건만 어두워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리워하던 두 연인은 만단정화를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다. 친구 옆에서 우리는 두 손을 마주잡고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빠! 사랑해. 나 잊지마.” 하던 청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 후 편지만 오고갔을 뿐 재회도 못하고 나는 영영 영동을 떠났다. 밝은 날 예쁜 청자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못 보았는데, 청자를 잊을 수 없는 것은 나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일까.

배움의 길을 찾아 상경한 나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 가고, 먹고 자는 걱정, 학비걱정으로 청자와는 소식이 끊겼다. 늘 마음에 보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건만 한가롭게 영애편지를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떠도는 신세라 주소가 일정치 못해서 편지 쓰기가 더욱 어려웠고, 친구도 고향을 떠나있어 편지를 보낼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 좋은 사람 만나 아들딸 낳고 잘 살기만을 빌 뿐이었다.

내가 대학교수가 된 후 30여년 만에 청자의 늙은 모습이 보고 싶었다. 나는 옛친구 정홍식 앞으로 친구를 보냈다. 그 친구가 이웃마을로 이사하였으나, 내 편지를 받고는 전화가 왔다. 서울과 중간쯤 되는 대전에서 만났다. 술잔을 기울이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건만 청자의 소식은 들려주지 않는다. 나는 말을 못하니 애가 탔다.

친구의 표정이 엄숙해진다.

“청자가 서울로 시집가서 2남 2녀를 두었는데, 몇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

뜻밖의 소식에 할 말을 잊었다. 이런 소식은 못들은 것이 오히려 좋았겠다.

“....... 귀여운 것. 오빠나 한번 만나고 죽지. 죽기 전에 찾아볼 것을 무정한 놈. 무정한 놈.......”

자책하며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니 참말 같다. 오늘따라 온 세상이 잿빛으로 캄캄하다. 가장 귀한 것을 잃은 듯 허전하기만 하다. 참으로 유행가 가사 같다. ‘하룻밤 첫사랑’

▲ [출처 ; 지니음악의 희망요정의 첫사랑에서]

서병덕 선생님

나의 진정한 스승님은 서병덕 선생님이시다. 1953년 옥천남교회(현 옥천교회 창고학교에 입학했을 때 영어선생님이시다. 창고학교가 교회의 사정으로 문을 닫게 되자 선생님은 영동 영산중학교(현 영동정보고등학교)의 정식 교사로 전근 가셨다. 배움의 길이 막힌 나를 장학생으로 추천하여 전학하게 하셨다.

나는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스승님은 당신보다 나이 많은 학생이 있었건만 잘 통솔하시며, 영어를 성심성의껏 가르쳐주어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신설학교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배구코치를 영입하여 배구부를 신설하고, 축구부도 만들었다.

스승님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결혼을 하시고 나서 옥천을 가셨다. 나는 어미닭을 잃은 병아리처럼 슬펐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는 영동으로 다시 오셔서 스승님 처남의 병원에서 일을 돕고 계셨다. 나는 대학 2학년 때 선불로 가정교사의 급료를 받아 등록금을 내주고 있었다. 그 집의 사업이 망하여 먼 곳으로 이사 가게 되어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게 되었다. 남대문시장 도매상에서 비누를 사서 팔러 다녔다.

영동에 들러 스승님을 뵈었다. 그 삼복더위에 스승님은 나를 데리고 다니며 비누를 팔아주셨다. 스승님의 친구, 지방의 유지, 영동장로교회 교인에게 몇 장씩 사게 하셨다. 스승님 덕에 알뜰하게 장사를 하여 여름방학 25일 만에 113만환의 이익을 남겼다. 그때 고려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은 75만환이었다. (화폐개혁 전에는 화폐의 단위 명칭이 ‘원’이 아니라 ‘환’이었다)

선생님의 도움이 컸다. 스승님은 서울 무슨 자동차보험회사로 직장을 옮겼다고 했다.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에 서울에서 한번 뵙고, 내가 결혼할 때 옥천 우리 시골집에까지 오셨다. 스승님의 부친은 이북에서 피난 와서 심천지서장과 심천명장을 역임하신 청렴결백하신 공무원이셨다. 스승님의 할머니와 어머님께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나를 친손자처럼 귀여워햐셨다.

그 후 소식이 끊겨 내가 대학교수가 된 후 스승님을 찾기 위해 영산중학교 영동교회, 심천, 옥천교회 등 스승님의 연고지를 두루 다니며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그런데 영도경찰서 정보과에 근무하는 강기동이라는 제자가 왔다.

“교수님, 스승님을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내 어머니처럼 나를 아껴주시던 스승님이시다. 꼭 찾아야겠는데, 연고지를 모두 헤맸으나 허사였네.

”제가 염탐해 보겠습니다.“

“그래, 이북에서 피난 오셔서 영산중학교에 근무하시다가 자동차보험회사로 직장을 옮기시었다는데, 연세는 70세쯤이며, 존함은 서병덕이시다.”

일주일 후에 기동 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교수님께서 애타게 찾으시던 스승님을 찾았습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제가 스승님과 직접 대화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응모 교수님이 애타게 찾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나는 선생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저 응모입니다.”

“어, 응모가? 교수, 박사라며.”

나는 국문학과실로 가서 만세를 부르듯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스승님, 찾았다.”고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영문을 모르는 조교와 몇몇 국문학과생들이 어리둥절해한다. 집사람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즉시 알렸다.

주말에 아내와 함께 경주로 달려갔다. 스승님은 한화자동차보험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스승님에게 인사드림과 동시에 얼싸안았다. 식당에 가서 우리 부부는 큰절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