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비토벌 차 호남으로 가다
1952년 1월의 어느 겨울날, 돌연 모든 수도사단 장병은 강능에 집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야전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탄약상자로 만든 책상, 집기 등도 요긴한 것만 남기고 모두 버리고 태웠다. 그리고 전 부대원이 그 많은 차량장비 등과 함께 강능해변에 정박하고 있는 LST에 올라탔다.
배가 출발하였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궁금하기 한이 없다. 이럭저럭 하룻밤을 항해하여 다음날 도착하고 보니 남해안에 있는 여수항이 아닌가.
쉴 사이도 없이 부대는 순천으로 이동하여 화차에 잔뜩 실린 탄약을 순천역 한쪽에 쌓기 시작했다. 원체 급하니 사단 후반부대의 다른 병사도 사역지원을 와서 상당히 많은 인원으로 탄약을 화차에서 내려 어깨에 메다가 여기저기 무더기로 쌓게 되었는데, 많은 병사 중에는 거치른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복잡하고 정신없이 어수선하게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한 병사가 탄약무더기에 탄약 상자를 팽개치듯 던져 쌓았는데, 거기서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탄약은 원래 일정한 거리를 띄워 쌓아놓아야만 한 무더기가 터져도 다른 무더기의 탄약에는 연폭되지 않게 쌓게 되어 있으나 비좁은 순천역에는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가깝게 쌓아놓았으니 이것이 터지면 쌓았던 탄약이 다 터질 것인즉, 순천역은 물론 시내도 큰 피해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닌 정말 큰 일이다. 우선 급한 대로 악을 쓰며 “저 불을 꺼라!”고 소리를 쳤다. 그랬더니 막 볼꽃이 피어오르려고 하는 순간 병사 중에 고향이 마산인 차삼용 중사가 어디에선가 거적을 가져오더니 그 볼꽃을 향해 돌진하여 그곳을 덮으니 요행히도 불리 꺼지고 말았다.
타다가 남은 탄약 상자를 헤쳐서 보니 우리나라 조병창에서 만든 미식 수류탄이 충격을 받아 발화하였는데, 막 연폭되려고 하는 찰나에 꺼진 것이었다. 이것을 상부에서 알게 되면 헌병대 기타에서 오라가라 할 것이어서 적당히 처리하고 말았다. 만약 이것이 잘못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원래 수도사단 장병이 북진까지 했으나 앞에서 말했듯이 함포사격 덕분에 희생이 적어 병사들은 대개 계급이 높고 1등 중사도 보초를 서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사고가 이만저만 많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당시의 부대 이동 때도 말썽이 생겼다. 공병대에서 무슨 밧데리인가를 쓱싹했다던가 전화 연락이 오기도 하고 야단들이며 골치 아프다.
그런데 일단 전투상황이 벌어지면 역시 고참병의 진가가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탄약 운반차에 포탄을 실을 때 탄약 상자를 땅에서 차의 적재함에 던지면 차례로 쌓게 되는 정위치에 어김없이 놓아지니 다시 줄을 고르고 쌓을 필요도 없을 정도이다. 이러니 불타오르는 탄약 무더기에 접근하여 불을 끈 것도 고참병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에 와서 어디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수 없으나 새삼스럽게 차 중사의 용감성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바이다.
책임자의 고충
수도사단은 군기가 엄하다는 이미 말했거니와 후방에 오기 전부터 상부에 하달되는 공문마다 민폐금지이다. 이 군기를 위반하면 어김없이 처벌이란다.
순천역의 구내에 천막을 쳐서 탄약보급소와 병사들 내무반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추운 겨울이 되어도 장작 한 다발 어디서 보급을 주는 일이 없었다. 더욱이 민폐를 끼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그냥 겨울을 지내라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무능한 장교는 부하 신임관계로 있을 수도 없다.
이러한 것이 부대를 밭은 책임자의 고충일 게다. 선임하사를 불렀다. 시침을 딱 떼고 명령하였다. 상사는 이 차를 몰고 가서 장작 한차를 실어 오라. 거기에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 상사도 나와 같은 처지이다. 경례를 하고 나가더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오후 늦게 장작을 한 트럭 싣고 왔다.
“수고했다.” 이상이었다. 만일 이것을 신병에 시켰다가는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다. 틀림없이 장작을 구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구하였다 하여도 도중 헌병검문소에 걸려서 상부에 보고되는 등 일이 되지도 않고 복잡하게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군대는 밥그릇이고 계급장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이 일을 다 한다. 아무리 대학을 나오고 학식이 있어도 군대에 신병으로 들어오면 별것 아니다. 겨우 글씨나 잘 쓸 줄 알고 공문이나 읽을 줄 아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어려운 일은 도무지 처리하지 못한다.
그러나 학교를 별로 다니지 못하여도 오래 군대의 물을 먹고 계급이 높으면 자기 이름 석 자를 잘 쓰지 못하여도 끄덕없이 어려운 것도 말썽 없이 잘 처리하고 만다. 이것이 군대이다. 나에게 지시를 받은 선임하사는 보나마나 소구경탄약을 몇 상자 싣고 공비가 진치고 있는 일선에 갔을 것이다.
그 당시 일선에는 전투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지서 같은 데서는 지급된 탄약도 모자라 밤만 되면 내려오는 공비에 대비하여 전전긍긍하며 지키고 있기 마련이다. 상사는 지서에 가져간 탄약을 내려주고 장작을 부탁했을 것이고, 일선에서는 쉽게 장작을 구할 수 있어 이것을 싣고 돌아오게 되는데, 돌아오는 길목 곳곳에는 군 헌병의 검문소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검문소도 장작이 없어 어려운 처지는 마찬가지이니 여기저기에 한두다발의 장작을 던져주고 유유히 돌아오는 것이리라.
공비토벌작전은 장소를 옯겨가며 진행되므로 탄약보급도 여기저기 때로는 밤에 이루어지는 수도 있다. 구례 지방은 밤의 차량통행은 주의해야 하므로 탄약차의 위에는 50mm 기관포를 적재하고 다녔다.
밤에 시골도로는 동네 사람들이 일정한 거리마다 불을 피워놓고 서로 지키고 연락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나는 후방에서 작전에 필요한 탄약만 공급하는 것이니 얼핏 보기에는 쉬운 것 같으나 적으나마 책임자로 있으면 책임질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법이다.
어느날 아침 채 날이 밝기도 전에 김 중사가 역 근처에 있는 내 숙소에 허둥지둥 찾아왔다. 숨쉬기에 헐떡대면서 우물쭈물 하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또 일어난 모양이다. 사연인즉 박 중사가 역에서 보초근무를 서던 중에 민간인을 총으로 쏘아서 죽였다는 것이다.
또 사고가 났구나, 급히 가서 역 철로 옆에 덮어놓은 거적을 들추어보니 20대 내외의 젊은 청년이 죽어 있는 것이다. 또 골치 아픈 일이 생겼구나. 낮이 되어 박 중사는 헌병대에 끌려가고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저녁 해질 때가 되어서 들려오는 말로는 박 중사는 보초근무를 충실히 해서 오히려 칭찬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별일 다 보는 구나 생각되었다.
내용인즉 죽은 사람은 그 당시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있는 26연대의 탈영병인데 다른 곳에 기차를 타고 가기 위하여 역 근처를 배회하다가 박 중사의 추궁에 걸려 암호를 대지 못하여 도망치다가 박 중사의 일격이 명중하여 죽게 되었다고 한다. 역시 이때의 빠른 결심과 동작들은 고참군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보초는 그렇게 서야만 철통같은 경계가 된다는 찬사가 상부에서 쏟아졌다. 도무지 세상사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