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은 나의 생애를 통하여 가장 불운의 해 중의 하나였다.
운명의 날은 3월 6일이었다. 매주 수요일 하루의 강의를 나오시는 이춘녕 선생님이 오셨으니 농화학과와 식품공학과 교수가 함께 식사를 하잔다. 언제나 선생님이 서울서 오시면 하던 일이다. 그런데 오늘은 학생수업이 4교시에 있어 참석하기 어렵게 되어 다른 선생님도 양해하였으나 조금 지나 시내 식당에서 연락이 오기를 조금 기다릴 터이니 조금 일찍 강의를 마치고 식당으로 나오란다.
이리하여 여러 선생님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이계조 선생이 내 차에 타면서 버스터미널에 내려 달라하며 “오늘 오후에 무슨 일 있느냐”고 나에게 묻는다. 나는 별일 없다고 대답하고 나서 어디를 가느냐고 물은즉 한국농화학학회 찬조회비를 받으러 풍한산업에 간단다.
사실 나는 오후에 특별한 볼일이 없을 뿐 아니라 자기 일도 아닌 학회 일로 이 선생이 55세가 넘는 나이에 버스를 타고, 그리고 가는 회사의 부사장이 나와 농화학과 동기생인데, 그 회사에 가는 것이며, 더욱이 내가 과거 이 학회의 회장직을 지낸 바도 있고 하여 그냥 무심코 넘기기엔 어려운 처지인데 이 선생이 아무 일도 없으면 같이 가 달란다.
거기서 자동차를 돌려 영등포 양평동에 있는 풍한산업에 갔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니 근방에 있는 식품관계 회사의 동창도 몇 명 오게 하여 영등포시장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맷돼지고기로 대접을 받고 술은 원래 못하는지라 마시는체하며 술잔에 입만 대고 말았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 헤어져서 혼자 차를 몰고 떠나고 보니 이전에 영등포 양평동에서 수원으로 출발해본 일이 없어 망설여지는데 동양맥주 쪽으로 가면 복잡할 것 같아서 영등포역 앞에 가서 좌회전 할 예정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역앞에 가보니 좌회전이 금지되어 있어서 부득이 인천 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한참 남쪽으로 내려가니 좌 쪽으로 지하터널이 나 있어 여기를 빠져나오니 구로공단이 나왔다.
이 공단은 과거에 한 번도 온 일이 없어 동서남북조차 구별할 수 없었다. 차를 세워 길 가는 사람에게 수원 가는 독산동 쪽은 어디냐고 물어 지시한 대로 가다가 또 한 번 차를 세워 물어 그대로 가니 항상 잘 다니는 독산동 큰 길이 나와 수원 쪽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문제가 된 곳에 이르는 동안 도로의 신호등이 빨간불이 켜져 있다가도 내차가 가면 진행신호인 파란불로 바뀌니 그대로 달렸다. 특히 안양풀장 입구나 군포 가는 네거리에는 수없이 많은 신호등이 있었으나 한 번도 걸리지 않고 무사통과하였다. 그리하여 비교적 교통이 복잡하던 의왕읍 당곡리도 거의 다 지나 이제 지지대 고개가 닥쳐오게 되니 속도를 내야 할 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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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시 서둔동에 위치하고 있는 舊서울농대의 정문 / 수원의 서울농대 캠퍼스는 2003년 서울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10여 년이 넘는동안 전형적인 폐교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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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보통 때와 달리 교통이 드물어 더욱이 북상하는 차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속도를 막 내기 시작하는데 도로 우측에 시외버스가 한가하게 한대 정차하고 있었으나 항상 그렇게 하듯이 차체 밑을 보아도 사람의 다리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거기에 횡단보도가 나왔으나 이왕 속도를 냈고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아 그대로 횡단보도를 지나치는 순간 갑자기 어린 여학생이 뛰어들다가 내 차를 보고 남쪽으로 피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내 차에 받히고 말았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진 것이다. 급히 차에서 내려 가보았다.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정신이 아찔하였다. 내가 사람을 치어 죽게 하다니 정신이 몽롱해지며 쓰러질 것 같았다.
겨우 정신을 차려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 사실을 멀지 않은 파출소에 알리게 하고 일은 벌어졌으니 누구에겐가 학교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하여 학교 통근차를 기다리기 위하여 남쪽으로 서서히 걸어갔다. 연락을 받고온 경찰이 멀리서 나를 불러 다시 되돌아오는데 마침 수원학교에서 퇴근하는 통근차가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 섰다.
그 후에 학교 교수님도 이러한 일이 처음인만큼 모두 자기일 인양 성의를 다해 수습해주시고 애를 무던히 써주셨다. 특히 교수일동이 조의금을 거두어서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등 이만저만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건 수습에 여러 선생님께서 많은 수고를 하셨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희생된 아이는 시흥동 의왕읍 당곡리 452-2에 사는 안양여중 2학년 15세 채영신 양이었다. 들으니 아버지가 중동에 갔다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북쪽에서 오는 차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뛰어내리면서 횡단보도를 달리다가 내 차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내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남에게 큰 덕을 보이지 못했을망정 그저 좋게 하여 살아오는 길인데 내가 사람을 죽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물론 인적이 드물었다고는 하나 횡단보도를 서지 않고 지나쳤으니 이것은 나의 일생일대의 실수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실수는 이미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어찌하여 그날 서울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을 갔고, 그리고 안 다니던 구로공단 쪽으로 가서 두 번씩이나 차를 세워 물었으며, 어째서 독산동에서 사고지점까지 수없이 많은 교통신호가 있었는데도 한 번도 걸리지 않고 지나갔으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초시간을 사고지점에 맞추기 위해 달려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말 구로공단에서 두 번씩이나 차를 세운 것 등을 생각할 때 확률로 푼다면 몇만분의 1의 확률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아니다. 이것은 무엇인가의 조종에 의하여 그렇게 된 것이 틀림없다. 전세의 업에 의한 소치인가? 결국 운명인가? 금년이 아홉수라 하더니 빈 소리가 아니고 정말인 것 같다. 어쨌거나 못다 피고 간 15세의 봉오리를 뿌리채 뽑아 없앴으니 내가 무엇을 하면 이 죄가 다소나마 탕감될 수 있을는지. 저 하늘에 있을 영신의 혼이여, 부디 명복을 비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