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탑의 회색분자와 남파간첩 용...

상아탑에 안주하는 회색분자로 살아가는 가운데 동백림사건이 터지고 6.25직전에 월북한 김용구가 간첩으로 내려온 흑산도 간첩사건이 일어났다. 석두와 같은 시기에 파리에 유학한 친구들은 대부분 연루되거나 중정분실에 끌려가 호되게 얻어맞고 나왔으나 석두는 무사했다.

동백림사건과 연루된 친구들과 술을 마신 친구들은 “누구 만났어. 이름을 대!” 중정의 조사에서 이름이 나와 연행되어 호되게 얻어맞고 나왔지만 석두는 술을 같이 마신 적이 없기 때문에 만난 적은 있어도 거명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김용구도 석두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다. 같은 야구부의 김양중만 자주 중정에 불려갔고 김용구도 양중에게 속마음을 얘기했다.

사리원대학의 부학장으로 있던 김용구는 평양 중앙당의 호출을 받아 평양으로 가기 위해 사리원역에 나왔다. 갑작스런 중앙당의 호출이 내려오자 용구의 아내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왜 우느냐는 용구의 물음에 대답하지는 않고 용구의 아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용구의 아내는 노동당 여맹의 간부출신으로 용구와의 결혼도 5년 전에 당에서 주선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용구와의 사이에 다섯 살과 세살 남매 두 아이를 가졌다. 당원출신인 용구의 아내는 중앙당의 갑작스런 호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틀림없이 남파작전에 투입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원한 이별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이다. “왜 호출하는지 무슨 새로운 임무가 주어질지 모르는데, 왜 울어요?” 하고 용구의 아내를 나무랐지만 아내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내의 눈물바람을 보고 집을 나선 용구는 마음이 어수선했다. 평양의 기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걸어 나가는데 누가 뒤에서 “용구 동무!”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용구는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동무는?”

“그래 나 태호야. 신태호.”

“아니 동무가 여기에?”

“용구 동무를 만나려고 사리원대학에 가는 중인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나는 평양에 호출되어 가는 중인데.”

“잘 됐어. 여기서 이렇게 만나서. 동무한테 부탁이 있어서 온 것인데, 이렇게 만났으니 내 모든 사정을 여기 썼으니 동무한테 부탁하네.”

“아니 무슨 부탁인데.......”

“읽어보면 알아. 동무만 믿네.”

그러자 평양으로 가는 기차가 도착해서 용구는 기차에 올라탔다. 용구와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반의 급장이었고, 매사에 신중하고 몸조심하는 태호가 왜 북녘땅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 무엇을 부탁한다는 말인가. 용구는 평양 가는 기차 안에서 태호의 편지를 읽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지면을 꽉 채운 편지는 용구에게 간절히 부탁한다고나 할까,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구맥회 문학서클의 동인이었던 태호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정치에 관심이 없고, 공부만 열심히 하고, 문학에 관심이 있던 태호가 문리대 정치학과에 진학한 것은 분단된 민족의 통일정부를 세우는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60년대 말 중앙대 교수 시절의 어느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자진해서 의용군에 가담한 것은 남쪽에서 정치학 공부의 꿈을 못 이루면 북쪽에 가면 김일성 대학에서 정치학 공부를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전이 되고 의용군에서 살아남은 남반부 출신들은 대부분 광부로 노동을 하고 있으며 태호도 그 광부의 한 사람이라고 했다.

광산에서 노동을 하는 것보다 정치학을 공부해서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김일성 대학에 들어가 정치학과 혁명 이론을 공부하고 싶다. 그러나 남반부에서 투쟁경력이 없는 태호의 소원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당원이자 사리원대학의 부학장인 동무가 당원으로 추천해주면 길이 열릴 수도 있지 않겠느냐, 제발 동창생 하나 살려 달라, 태호의 편지에는 구구절절 간절한 호소와 꿈이 있었다. 그러나 용구로서는 태호의 간절한 호소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중앙당의 용구에 대한 지령은 예상한대로 남반부에 내려가 당의 새로운 세포를 만들고 돌아오라는 것이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일주일동안 암호와 연락망 등에 관한 특별교육을 받고 즉시 떠나라는 명령이었다. 조용히 눈물만 흘리던 아내와 어린애들도 보지 못하고 당장 떠나야 하는 용구에게 태호의 소원을 들어줄 겨를이 없었다.

용구는 소형 쾌속정으로 남하, 흑산도에 쉽게 상륙할 수 있었고 목포항을 거쳐 광주까지 침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주의 허름한 호텔에 투숙한 김용구는 남반부의 분위기가 북한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중앙당에서 지령 받은 접선 대상의 인물들을 과연 만날 수 있을까. 만난다고 해도 기대했던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감각적으로 느낀 것이다.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된다고 느꼈다. 그리고 호텔 보이에게 신문을 사다달라고 5천원 권 한 장을 주었다. 보이는 의아스런 표정을 지으며 용구를 쳐다봤다. 순간 용구는 내가 뭔가 잘못했나 하고 생각했으나 보이는 잠잠히 나갔다.

그러나 돌아온 보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몇 명의 중앙정보부 관주 파견요원이 들이닥친 것이다. 용구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그들을 따라갔다. 그리고 수감되었다.

용구는 조사관에게 묵비권을 행사하고 정보부의 부장이 오면 입을 열겠다고 했다. 수사관에게 자기가 거물 간첨임을 은근히 내비쳤다. 용구는 뭐가 됐든 당당히 처신해야 하고, 어느 한쪽의 희생물이 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용구는 사리원에 두고 온 아내와 어린애들 생각이 났지만 그보다도 사리원역에서 만난 태호와 그가 깨알 같은 글씨로 쓴 애절한 편지 생각을 떼어버릴 수가 없었다. 미래가 창창한 정치학도 태호가 전쟁의 희생양이고 이제는 전쟁의 녹슨 파편이 되어가고 있다면 자신도 태호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태호는 그동안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행동하고 있다며 청춘을 불살랐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도 남반부의 이승만과 다를 것 없는 권력 집착형 정치인이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위인이며 민족과 인민을 위한다는 것은 권력을 지키기 위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것 같았다.

그 권력의 후광을 좆아 영웅적 투쟁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느 쪽의 권력에 이용이 되든 간에 민족의 미래를 위해 긍정적으로 이용된다면 보람 있는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용구는 정보부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버텼다.

용구는 정보부의 부장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차장급의 고위 인사를 만났고, 전향했다. 왜 간첩이 암호수첩이 없느냐고 수사관이 따졌지만 용구는 수첩없이도 정확한 암호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대북방송에 적극 협력했으며, 정보당국의 권유로 두 번째 결혼도 했다. 남북에 이산가족을 만드는 것이 슬펐지만 전쟁이 가져다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정보당국의 권유에 따랐다.

석두는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만나서 더 많은 얘기를 들었어야 하는데, 서로 몸조심 하느라 만나지 않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회색분자와 위장자의 서글픔이라고나 할까. 용구는 전쟁의 녹슨 파편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