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하는 극동항로
석두는 전쟁이라는 엄청난 재앙에서 살아남은 것만 해도 하나의 기적인데, 파리에 유학을 오고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영화와 연극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파리 체류 4년째 되는 겨울, 귀국을 종용하는 어머니 편지를 받았다. 한국영화계가 활기를 띠고 있으니 빨리 돌아와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석두는 귀국을 결심했다. 귀국하라고 보내온 비행기표를 바꿔서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일본의 요코하마에 이르는 이른바 극동(極東)항로의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이른바 인도차이나에 식민지를 겪고 있던 프랑스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로 이름을 붙인 세 척의 화물선 겸 여객선을 극동항로에 운영하고 있었다. 석두는 그 중 하나인 라오스에 몸을 실었다. 지중해를 횡단(橫斷),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고 홍해를 거쳐 인도양을 횡단하고 싱가포르와 사이공을 거쳐 다시 마닐라에 기항했다.
홍콩을 거쳐 남지나해를 횡단하여 일본의 고베항에 이르는 한 달간의 항해였다.
석두는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 되어 돌아온 것인가. 나는 파시스트라고 서슴치 않고 말하는 이태리 처녀나, 나는 공산당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는 프랑스의 여대생처럼 떳떳이 나를 내세울 신념이 없었다. 여전히 회색분자로 귀국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선의 라오스선상에서 베트남 청년을 만났다. 그는 사이공에서 하선했는데 정치적 신념을 갖고 귀국하는 것 같았다. 같은 선실을 쓴 미국 청년은 권총을 가슴에 차고 있었다. 미국의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것 같았다. 그는 석두를 오히려 부러워했다.
“너는 좋겠다. 네 나라는 단일민족이잖아.”
“단일 민족이면 뭘 하냐? 분단국가로 나누어져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단일민족이면 그래도 희망이 있다. 우리는 다수 민족, 인종차별, 골치 아프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산다는 미국 청년도 그 나름대로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이면 더욱 골치 아플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엇이 되어 돌아온 것인가. 무엇이 되어 귀국선에 승선한 것인가...... 나는 여전히 회색분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석두는 무엇보다도 살아남기 위해서 양쪽진영이 싫어하는 ‘회색분자’인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살아남기 위한 위장으로 회색분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좌우 어느 한쪽의 신념을 가질 수 없어서 회색분자이기도 했다. ‘어느 쪽에도 편들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회색분자로 만족한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석두는 한 달간의 향해를 끝내고 고베[神戸]항에서 하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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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 유학시절 소르본느대학 캠퍼스에서(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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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京都]에서 이틀간 관광을 하고 도쿄[東京]으로 가는 신칸센[新幹線]기차를 탔다. 사이공에서 산 베트남 모자를 쓴 석두에게 순회공연 하는 예인(藝人)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석두를 일본 사람으로 본 것이다. 석두는 미소만 지었다.
기노모 차림의 한 여인이 석두 옆에 앉았다. 대뜸 여인은 석두에게 쿠니(나라)가 어디냐고 물었다. 석두는 한국사람이라고 답했다. 여인은 “그건 알겠는데 쿠니, 그러니까 남과 북, 경상도냐, 전라도냐”고 물었다. 석두는 순간 당황했다. “남쪽입니다. 전라도 경상도 서울 다 살아봤으니까 고향은 남쪽입니다.” 하니 여인이 웃었다.
여인은 일본 기모노를 입고 있었는데, 일본 여인이 아니고 재일교포였다. 석두의 일본말을 듣고 조선사람인 것은 금방 알아봤는데 고향은 애매해서 물어봤다는 것이다. 여인은 대개 일본말 악센트를 들으면 남쪽인지, 북쪽인지, 전라도인지, 경상도인지 금방 아는데 석두의 일본말 악센트는 묘한 악센트라고 했다.
일본 가고시마의 악센트 같기도 하고 그래서 남쪽인지 북쪽인지 애매하고, 그런가 하면 전라도 같기도 하고, 경상도 같기도 해서 물어봤다는 것이다. 석두는 미소를 지었다. 내심 ‘회색분자의 일본말 악센트를 어떻게 알아보겠느냐?’
하여튼 석두는 일본의 신칸센 기차 안에서 일본의 기모노를 입은 동포여인을 만나서 반갑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석두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어느 쪽인가?’ 여인은 도쿄에서 또 만나자고 했다.
한편 석두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이제 20대 후반 30대에 가까워지는데 대체 나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방황하고 있는 것인가, 일본 식민지시대 15년, 중학교 2학년에 해방이 되어 분단국가의 좌우갈등과 6.25전쟁과 대학시절 10년, 그리고 프랑스 유학의 자유로운 시절 4년, 만 28년의 생애. 어쩌면 마지막 청춘을 끝맺음하고 있는데 이국 땅에서 우연히 만난 동포 여인을 경계해야 하는가.......
석두는 여인을 다시 만나지 않았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강단으로
1959년 2월에 석두는 귀국했다. 그해 3월에 중앙대학교에 4년제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연극영화과가 신설되었다. 중앙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신설된 것이다. 당시 중앙대 문리과대학 학장이었던 백철(白鐵) 선생은 학과는 신설되었으나 정규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생긴 것은 처음이라 누구를 강사진으로 초빙할지 몰랐다.
문학평론가이자 중앙대 문래대학장이었던 백철 교수는 연극계의 원로라고 할 수 있는 유치진(柳致眞) 씨에게 좋은 사람 있으면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유치진 선생은 석두를 추천했고, 그래서 중앙대학교의 전임강사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중앙대 문리대의 연극영화과는 예상한대로 폭발적인 인기가 있었다. 신설되는 학과에 20대 1 이상의 경쟁률이었다. 석두가 처음 맡은 강좌는 ‘연극영화개론’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영화강의를 하고 동인제 극장인 <민중극장>, <자유극장>에 참여해서 열심히 연출작업을 했다. 그 사이에도 4.19와 5.16의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겪었으나 대학의 상아탑에 안주하는 회색분자로 살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