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탓에 이뎃크를 그만두고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운 소르본느 대학의 영화학연구소(institut de cinéma)와 현대 불문학 강좌만 수강하고 영화와 연극을 보는데 주력했다.
연극이나 영화를 열심히 보러 다님으로써 여자친구를 사귀는 데도 궁하지 않았다. 프랑스 여대생이나 외국 여학생들이 연극이나 영화를 같이 보러가자고 하면 거절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사귄 여자친구 가운데는 석두를 당황하게 하는 친구도 없지 않았다. 로마에서 온 이태리 여자친구와는 이런식의 대화였다.
“너는 나의 열아홉 번째 여자친구야.”
“열아홉 번째라고. 그러면.......?”
“오해 하지 마. 입만 맞춘 거니까......”
“나는 파시스트야.”
“파시스트라고? 파시스트는 나쁜 놈들이야. 파시스트라고 공언하고 다니지 마.”
“아니야. 나는 파시스트야.”
이런 엉뚱한 이태리 여학생이 있는가 하면, 어느 프랑스 여자친구는 “나는 공산주의자야.” 하고 서슴지 않고 공언하고 다녔다. ‘공산주의자와 접촉하고 다니면 안 되는데.’ 그러나 그들이 ‘위험인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유의 의미와 자유의 한계가 달랐다. 대한민국 서울에서는 50프로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면 프랑스의 시민들은 99프로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석두는 때로는 당황하고 때로는 헷갈렸다. 그러나 몇 달 시간이 흐르자 석두도 그 자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파리에는 공사관 직원과 유학생, 신부님과 수녀님들 합쳐서 한국인이 70여명 있었다. 유학생들은 20~30명이 주말이면 뤽상부르 공원에 모였다.
뤽상부르 공원은 공짜로 앉을 수 있는 벤치도 있고 해서 돈들이지 않고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140불이 한 달에 송금 받을 수 있는 한도라서 모두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다. 대개가 불문학, 정치학, 법학공부를 하겠다고 파리에 온 유학생들로 석두와 같이 영화나 예술분야 공부를 하겠다고 온 유학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뤽상부르 공원에 모이는 한인 유학생들 가운데 음악가 윤이상이 있었다. 윤이상은 유학생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많은 편으로 작곡을 한다고 했다. 윤이상은 구라파에 싹트고 있는 새로운 음악을 연구하고 한국의 전통음악이 기반이 되는 새로운 음악을 작곡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는 파리에 머물다가 독일로 넘어가겠다고 했다.
뤽상부르 공원에 인접한 류다사스(ryu d’ Asas)에 수화 김환기 화백이 부인 김향안 여사와 함께 아담한 아틀리에를 빌려 작업을 하고 있었다.
파리 미술학교와 인접한 류다사스의 화랑에서 수화의 개인전이 열렸고, 거기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석두는 파리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준비 중인 정성배,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파리로 경제학 공부를 하러 왔으나 경제학보다는 미술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유준상, 슈안스포에서 역시 정치학을 공부하는 김명환 등 서너 명과 어울려서 김환기 화백의 아틀리에를 자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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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 유학시절 의대생이었던 프랑스 친구와 파리에서 사귄 이태리 여자친구 '도나텔레'와 함께 로마에서(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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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화백의 아틀리에에 가면 좀 염치는 없지만 김향안 여사가 준비해주는 고향 음식을 먹을 수 있고, 현대미술과 예술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그들은 자주 김환기 화백을 찾아간 것이다. 김환기 화백을 중심으로 해서 화제는 으레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고향 음식얘기로 막을 내렸다.
하루는 고향 음식 얘기를 하다가 흑산도의 홍어 얘기가 나왔다. 다도해 신안 출신인 수화는 홍어맛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었다. 정성배가 생제르맹의 시장에 가면 홍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튿날 정성배와 수화 그리고 석두 세 사람은 생제르맹 데 프레의 시장에 가서 홍어를 발견하고 한 마리를 사들고 의기양양해서 왔다.
김향안 여사의 솜씨가 가미되면 맛있는 홍어회가 나오리라고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프랑스 수산시장의 홍어는 흑산도 홍어와는 전혀 달랐다. 질겨서 횟감으로는 도저히 먹을 수 없고 익혀도 먹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모양은 흑산도 홍어와 꼭 닮았는데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모두 실망했다. 그러나 풍토가 다르면 문화가 다르듯이 음식맛도 다르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것이다.
파리에 유학 온지 2년차 되던 해, 동랑(東朗) 유치진 선생이 부인과 동반해서 파리에 왔다. 동랑과 석두의 인연은 동숭동의 문리대 캠퍼스에서 동랑의 희곡론 강의를 수강한데서 출발하지만 그보다도 반공연맹의 희곡현상모집에서 당선한 오상원이 그때 심사위원장이었던 동랑에게 석두얘기를 과장해서 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파리에 한 달 머무를 예정이었던 동랑은 석두에게 안내를 부탁해온 것이다. 동랑이 원하는 파리에서의 활동은 연극인들을 만나고 극장을 방문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석두의 관심사와도 일치했다.
동랑은 파리의 유네스코에 본부가 있는 국제극예술협회(international Theatre Institute) 약칭 ITI의 본부를 방문하자고 했다 동랑은 ITI의 한국본부를 만들었으면 한 것이다.
동랑은 1957년에 유네스코의 ITI를 방문, ITI한국본부의 발족과 가입의사를 표명했고, 1958년에는 유치진과 오영진이 한국대표로 헬싱키 총회에 참가했다. 석두는 총회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그 중간 심부름을 했다.
그동안 한국 연극이 일본을 통해서 서구연극을 받아들였다면 ITI 가입 등을 계기로 서구 연극을 직접 만나고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詩_부근
안국동 로타리를 지나
석양에 물든 붉은 벽돌에
부착된 쪽지를 읽었다
‘이 부근 배회 금지’
어리벙벙 주위를 살피고
나도 모르게 발길이 빨라졌다
이곳을 그냥 통행했을 뿐
배회가 아니다
그렇게 나는 속으로 외쳤다
오래된 동굴의 암흑에의 집착
아니면 어떤 기밀을 위해
어느 부근을 배회하는 것이냐
국적 없는 편의대(便衣隊)*
시인(詩人)이여
고단한 눈시울에 밤은 광석(鑛石)처럼 얹히고
영원한 부재(不在)의 변두리와 같은 나의 부근에
어쩌다 자라난 한그루 수목
그날 밤 이미 죽지를 꺾인 비들기처럼
나의 손은 그대로 백지(白紙)의 부근에 놓여 있었다
석두, 1953년 6월
*편의대 / 상인, 농민 등의 평샹복 차림으로 위장한 군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