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유학 (30회)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성립되었다.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했지만 유엔군에 속해 있는 한국군도 휴전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일단 한국전쟁은 종식을 한 것이다.

중공군은 신속히 북한에서 철수했고, 유엔군에 참가했던 22개 참전국가(전투병은 16개국)의 군대도 휴전감시단만 남기고 철수했으나 미군은 한국군과 연합사령부를 구성하고 잔류했다. 그러나 분단된 휴전선의 감시는 한국군이 떠맡고 미군은 후방에 주둔해서 한국군은 지원하는 역할을 주로 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그 성격이 애매하고 부조리한 전쟁이었다. 혹자는 민족상잔의 동란이라 했고, 혹자는 열강의 대리전쟁이라 했다. 그런가하면 나를 포함해 위장된 제3차 세계대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하튼 한반도를 폐허로 만들고 300만 명이 넘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온 한국전쟁은 종전(終戰) 아닌 정전(停戰)을 맞이한 것이다.

전쟁을 구실삼아 권력에 집착했던 이승만 대통령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폐허가 된 한반도, 거기에 전쟁으로 치명타를 입은 두 정권이 공존하며 경쟁을 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전쟁을 맞이한 청소년들에게 제대로 교육을 받게 하고 미래의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진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과 구라파에 병역을 치르지 않은 학생들에게 병역을 보류하고 해외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단 유학 검정시험을 치르게 하고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출국 시에 6백불, 그리고 매월 140불을 환전해서 송금할 수 있게 했다.

연간 수출액이 1백만 불이 채 되지 않고 외화 보유액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외환 사정과 암달러 시세가 공정환율의 배가 넘던 외환사정을 고려할 때 해외 유학생에게 주어진 혜택은 각별한 정책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조치였다.

불문과의 구도 동인이었던 석두는 1956년 봄 영화 공부를 한다고 프랑스 파리로 떠났고, 이어서 같은 이유로 이일이 파리로 왔으며 박이문도 불문학을 공부한다며 뒤늦게 파리에 왔다.

석두는 여의도의 비행장이라기 보다는 그냥 황량한 들판같은 비행장에서 KNA의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동경으로 건너가 다시 동경에서 미국 비행기 팬암(Pan Am)으로 바꾸어 탔다. 팬암의 미국 여객기는 2차대전 중 일본과 독일을 초토화시킨 그 유명한 폭격기 B29를 개조한 것 같았다.

석두를 태운 팬암여객기는 동경을 출발해서 홍콩, 테헤란, 베이루트, 로마에 기착했다가 파리에 도착했다. 주유 등을 위해 여러 군데의 공항에 기착한 때문에 만 이틀이 걸려서 파리에 도착했다.

베이루트에서는 베이루트 공항에서 멀지 않은 비잔틴 유적지를 벼락치기로 관광시켜주었으며 로마에서는 공항의 야외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에스프레소 커피를 처음 마신 석두는 ‘이태리는 커피에도 인색하다’고 생각했다. 웬 커피잔이 그렇게 작은가?

석두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국으로 엽서를 쓰고 있었다. 로마공항은 아직 제대로 건축되지 않고 허허벌판이라는 느낌이었고 그래서 야외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파일럿이 찾아와서 빨리 비행기를 안 타고 뭐하느냐고 재촉했다.

▲ 파리유학을 떠나기 전 석두의 부모님과 형님 동생이 한 자리에 모였다

석두는 기장을 따라 비행기에 탔다. 다른 승객들은 다 자리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비행기를 타라고 여러 번 방송했는데 석두는 알아듣지 못하고 한가로이 고국으로 엽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파리는 석두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전후 10년이 흘렀는데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으나 파리의 공기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되었다. 자유를 숨 쉬는 공기는 통행금지 시간이다, 반공법이다, 그리고 일제의 잔재인 허구한 금지 관행 속에서 숨 쉬는 고국의 공기와는 그 무게가 달랐다.

파리의 공기와 서울의 공기는 산소나 화학적 수치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정신적 수치가 달랐던 것이다. 출구 없는 지하실의 공기와 참새들이 자유로이 나는 하늘의 공기가 다르듯이 서울과 파리의 공기는 다르다고 생각되었다. 더욱이 석두의 관심분야였던 연극이나 영화분야에 있어서 파리는 여전히 세계 문화 예술의 중심도시였다.

미술분야에 있어서도 피카소와 베르나르 뷔페(Bernard Buffet, 1928. 7.10.~1999. 10.4.) 등의 활약으로, 또 2차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종주국이 된 미국경제의 힘을 배경으로 뉴욕이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도시로 떠오르고 있었으나 아직은 파리가 뒤지지 않고 앞서간다는 느낌이었다.

영화는 2차대전 이후 빅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감독의 <자전거 도둑>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감독의 <무방비 도시> 등이 이른바 네오 리얼리즘의 이태리 영화가 주목을 받았으나 1950년대 후반에는 알렝 레네(Alain Resnais),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 Francois Roland Truffaut) 등 이른바 프랑스의 누벨바그(Nouvelle Vague)가 예술영화의 세계적 주류로 등장했다.

미국의 할리우드는 상업적인 면에서는 세계의 영화흥행을 주도했으나, 예술적인 면에서는 이태리, 프랑스, 독일, 스웨덴, 영국 등 구라파 영화가 주도했다고 볼 수 있으며 파리는 그 중심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영화의 관객운동이라 할 수 있는 <씨네클럽>운동과 시네마테크로 대표되는 꾸준한 필름 라이브러리 운동은 영화를 단순한 흥행이나 오락으로서가 아니라 20세기의 새로운 영상문화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영화에 못지 않게 연극도 파리가 세계적 중심도시라는 명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Samuel Barclay Beckett),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등 이른바 반 사실주의적 새로운 작가들의 작품이 활발히 공연되고, 파리시와 정부가 공동주최해 세계공연예술제를 개최함으로써 희랍극, 패킹 오페라, 심지어 한국의 창극 춘향전까지 선보임으로써 세계공연예술의 수도는 여전히 파리라는 주장이 어색하지 않았다.

석두는 이러한 예술적 환경 속에서 바빴다, 영화대학(IDHEC)에 입학했으나 자퇴원서를 냈다. 강의를 듣는 시간마저도 아깝게 생각되었다. 시네마테크에서 매일같이 영화를 두서너 편 보고 화제의 연극공연을 빠지지 않고 보려면 바빴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