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맥회(九麥會)는 이름처럼 소박하게 살며 문학을 하자던 아홉 명의 문학 소년과 소녀가 전쟁의 매서운 회오리바람에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걸탄은 폐병을 앓으면서 약물치료를 받지 못하고 떠나갔고, 서홍(瑞紅)은 도민청을 따라 영암의 월출산에 입산했다가 전사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를 위해 빨치산들이 탄약이 부족한데도 모두 조포를 쏘았다고 했다.
그는 누구를 위해 싸웠는가? 민족을 위해, 또는 인민을 위해 용감히 싸웠다기 보다는 그냥 입산을 하게 되었고, 강한 성격의 서홍은 총을 잡으면 용감히 싸울 수밖에 없었다. 서홍은 가까운 친척의 외숙이 국군의 헌병사령관이었다. 그러한 가족 환경을 가진 서홍이 유격대의 영웅으로 전사를 하다니 아이러니한 시대의 장난이 아닐 수 없었다.
문리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한 태호는 인민군의 의용군에 입대해서 이북으로 갔다는 소문이 있을 뿐 아무도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태호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범생으로 매사에 신중한 성격이었다. 정치적으로 의심을 살 데모라도 해야 하는 경우가 되면 서슴지 않고 결석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리는 태호였다.
그러한 태호가 인민군의 의용군으로 자진 입대할 리가 없다. 그러나 소문에는 자진 입대했다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튼 아홉 명의 구맥회 동인 가운데 세 명이 1950년 시작한 6.25전쟁 1년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남은 여섯 명이 이튿날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남은 사진에는 다섯 명만 있다) 사진 하단에 구맥의 파편(九麥의 破片)이라고 캡션을 달았다. 그들은 전쟁의, 파편으로 살아남은 것같이 느껴진 것이다.
광주에 돌아와서 한 달 쯤 지나자 언제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우선 거리에서 불심검문으로 군대에 끌려가는 일은 없어졌다. 그만큼 한국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것이다. 리치웨이 8군 사령관의 피스톤작전에 중공군이 조심스럽게 후퇴를 시작하는 마당에 결전을 벌이기보다는 현상유지를 하는 것이 그들의 작전이요, 정책인 듯 싶었다,.
김일성의 인민군이 겁 없이 낙동강까지 밀고 갔다가 후반 보급로의 차단으로 고전을 겪다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지리멸렬(支離滅裂), 북으로 후퇴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중공군은 신중을 기했다.
이렇듯 전선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도 정신을 차렸다. 대학생들을 전선으로 보내 소모품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학업을 계속하게 해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나 할까? 하여튼 부산, 대구, 광주 등지에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하고 대학에 재적한 학생들은 학업을 끝낼 때까지 징집을 면제해야 한다고 했다.
석두도 대학생의 신분으로 되돌아왔다. 중앙대학교 국문과 2학년으로 등록하고 전시연합대학에 나가 강의를 듣게 되었다.
전시연합대학에서는 문학을 지향하는 젊은이들이 자연히 어울렸고 조선대학교 교수로 있는 시인 김현승, 희곡과 소설을 쓴다는 장용학, 숙명대 교수를 하다가 광주로 내려와 광주서중 교사가 된 박흡, 개업의이면서 소설가이자 시인인 손철 등 선배 문인들과 젊은 문학도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마침 광주에 피난해온 임정희 여사(시인 박용철의 부인)가 <신문학>과 <시정신>을 발간하여 광주의 문인들에게 지면을 제공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문학적 창작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부산에는 전시연합대학 말고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등 단과대학교 개교했다. 석두는 중앙대학교 국문과에서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불문과로 옯겼다. 헐리우드 영화보다는 문학성향이 강한 프랑스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나할까. 그보다도 일본어로 번역된 ‘보들레르’나 ‘랭보’의시를 읽고 벼락치기로 불어 공부를 해서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당시의 문리대 불문과는 정원이 10명이었고, 지원한 학생은 100명 가까웠으므로 10대 1의 경쟁을 뚫고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50년도에 입학한 10명, 51년도에 입학한 10명이 구덕동 천막교실에 모였는데, 50년에 입학한 학생은 오상원 한 명밖에 없고, 51년 입학생 열 명이 주류라 할 수 있었다.
그전 입학생들은 통역장교, 문관 등으로 떠나고 불문과 강의실에는 고작 열 한두 명이 수강을 했다. 그 가운데 오상원, 박이문, 이일, 그리고 석두, 네 명의 불문과생과 사학과의 홍사중, 국문과의 김호 등이 모여서 구도(構圖) 동인을 만들었다.
이 구도 동인에는 연세대의 정창범, 이화여대의 허윤숙 등이 참가했으며, 광복동의 금강다방, 휘가로다방 등을 드나들며 문학을 논하고, 제대로 된 작품을 내놓지 못하면서 기성문단을 우습게 보는 허세를 떨고 다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김동리, 조연현 등 문예지의 원로 또는 기성작가들이 진치고 있는 금강다방보다는 김경린, 이봉래, 박인환, 김규동 등 후반기(後半期) 동인 시인이 모이는 휘가로다방에 빈번하게 드나들었다.
석두도 후반기 동인의 시인들을 선배 시인으로 모시고 문예지의 신인추천제도에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광주와 부산을 자주 왕래할 기회가 있어 광주에서 발간되는 <신문학>과 <시정신>을 대구와 부산의 문학인들에게 전해드리는 심부름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대구에서는 종군작가단의 부단장으로 있던 시인 구상을 찾아가 새로 나온 <신문학>과 <시정신>을 전해주었고 구상은 석두를 대구에 있는 종군작가단의 문인들과 어울리는 주석에 데리고 갔다. 그 주석에서 석두는 역시 시인 지망의 여대생 혜수를 만났고, 혜수는 그 이튿날 종군작가단 주최로 백선엽 장군이 대장으로 승진하는 축하모임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백선엽 장군은 중장(中將)에서 대장으로 승진했는데, 우리 국군 최초의 대장, 그러니까 국군의 제1호 대장이 된 것이다. 국군 제1호의 대장의 탄생은 뜻있는 일이요, 한국전의 전세를 유리하게 역전시키는데 한국군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백선엽 장군의 대장 승진을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석두는 전쟁과 국군 최초의 대장 탄생에는 관심이 없고 여대생 혜수가 어떤 시를 쓰는가가 관심이었다. 혜수는 부산에 내려가면 구도 동인의 친구들도 소개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혜수는 부산에 오지 않았다.
전쟁의 생리는 그때그때를 산다고나 할까,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착할 뿐, 약속이나 내일을 기하는 것은 그냥 해보는 소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