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현과의 전라도 피난 길 (26회...

기차는 여전히 느리게 달렸다. 짐이 없는 사람은 내렸다가 달려와서 다시 탈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달렸다. 피난열차가 대전역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 피난열차는 피난민을 위해 특별히 운행한 것으로 대전 이남에는 그나마 없었다.

대전역도 석두가 호남선을 타고 서울을 올라 다니던 그 옛날의 역이 아니었다. 영화에 나오는 미국 서부 개척 당시의 역사(驛舍)랄까, 그런 하꼬방 같은 역사가 있고 선로는 제멋대로 엉켜 있을 뿐 허허벌판이었다.

피난민들은 서로 가족이나 일행을 챙기느라 아우성이었다. 각기 다른 차량에 탔었으나 석두와 목사님, 목사님 부인과 세 명의 고아 그리고 미스터 현의 여동생 일곱 명은 눈을 부비며 나타났다.

대전에서 석두와 목사님 일행은 헤어지기로 되어 있었다. 목사 일행은 영남으로 석두와 미스터 현의 여동생은 호남으로...... 걸어가기에는 추풍령을 넘어야 하는 영남보다는 평야지대인 호남이 더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호남으로 피난을 갔다가 이번에도 중공군이 내려올지도 모르니 부산으로 같이 가자고 목사님은 말했다.

그러나 석두는 이번에는 호남으로 중공군이 내려오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인민군이 밟은 잘못된 전철을 중공군이 또다시 밟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차라리 호남으로 내려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석두는 말했으나 양 목사는 그래도 피난을 갈 바에야 부산으로 가는 것이 순리라고 했다.

그러나 양 목사는 고아 셋을 데리고 뚜렷한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간다는 것이 무척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양 목사는 고아 중 한 명을 석두와 미스터 현의 여동생이 데리고 갔으면 했다. 특히 현양은 기독교 신자이니까 고향으로 데려가서 돌보아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현양은 불가능하다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담양은 치안도 불안정하고 교회의 활동도 미약해서 불가능하다고 했다. 석두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냥 있었다. 양 목사는 한숨을 쉬며 먼저 출발했다. 혹시 기차 편이 있으면 편승할 요량으로 걸어갔다.

석두와 미스터 현도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을 따라 1번 국도를 찾아 걸었다. 길가의 양쪽에는 노점상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전쟁의 회오리바람도 왕성한 상혼을 잠재우지는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석두가 저만치 걸어가는데 미스현이 따라오지 않아 되돌아갔다. 미스현은 화장품을 사려 흥정하고 있었다. 미스현은 꽤 비싼 값으로 화장품을 샀다. 이 난리 통에 이 절박한 상황에서 화장품을 사서 뭐하냐? 석두는 어이가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전쟁과 화장품이 잘 어울린다고 비꼬아 생각하기도 했다. 오후 서너 시가 되어서 논산역에 도착했다.

논산역에는 마치 석두와 미스현을 기다린 듯이 객차 3량을 단 열차가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시 피난민 같은 사람들로 초만원이었다. 그러나 오산에서의 피난 열차처럼 사람들이 지붕 위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달리는 속도도 더 빨랐다.

밤 9시경에 이리역에 도착했다. 석두는 하루 사이에 꽤 많이 왔다고 위로하며 오늘 밤을 어떻게 지낼까 하고 궁리를 했다. 역전 가까이에 여관이 있었다.

석두와 미스현은 아무 말 없이 여관으로 들어갔다. 주머니 사정과 피난민 행렬에 끼어온 형편에 방을 둘 얻을 수 없었다. 방에는 이불과 요가 하나밖에 없었다. 한 이불 속에 처녀와 총각이 함께 자고도 아무 일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라고 석두는 생각했으나 한편으로는 아무런 욕망을 느끼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 한국전쟁 당시의 이리시가 항공사진 [출처 ; 미 해군 해군역사박물관]

밤새 피난 열차를 타고 오고 다시 백리 길을 걸어와서 기차를 타고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욕망인가. 오직 발을 뻗고 누워서 잠들 수 있다면 그 이상은 없는 것이다.

그것보다도 석두는 미스현에게 약간의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양 목사가 고아 한명만 데려가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데 냉정하게 단호히 거절한 것과 이 어려운 판국에 화장품을 산 것이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충분히 매력 있는 여인이었지만 호감이 안간 것이다.

“잠 오죠? 우리 자요. 안심하고 자요.”

하고 석두가 내의만 입고 이불속으로 들어가면서 어색하게 말했다.

“안심할만한 사람이니까 여관방까지 따라왔지......”

하면서 미스현도 내의만 입고 이불속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석두는 쉽사리 잠들지 않았다. 어느 쪽을 보고 자야할지 엎치락뒤치락 그러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이튿날 석두가 온몸이 가려워서 몸을 긁적거리며 일어나니 아침햇살이 창호지를 통해 방안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미스현도 몸을 긁적거리며 일어났다.

두 사람은 동시에 “어메!”하고 비명을 질렀다. 몸을 긁적거리다 내의를 들춰보니 내의에 이가 하얀 것이다. 석두와 미스현은 서슴지 않고 윗 내의를 벗어들고 밖으로 뛰어나가 내의에 허옇게 붙어 있는 이를 털었다. 이가 하얀 마당에 허옇게 떨어졌다.

이가 어디서 이렇게 많이 나타났단 말인가? 여관방 이불에서? 여관방 이불에 그렇게 많은 이가 있을 리 없다. 피난 열차에서 옯은 것이다. 하루 동안 그렇게 이를 많이 몸에 품고 다녔으나 너무나 긴장해서 지냈기 때문에 가려운지도 모르고 지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석두와 미스현은 열심히 이를 털면서 “이럴 수가”를 연발하며 쑥스러운 웃음을 교환했다.

미스현이 입을 열었다.

“밤새 신사적으로 대해주어 고마워요.”

“뭐, 신사적이라기보다 그냥...... 고마워할 것은 없어요.”

“내가 화장품 사는 게 못마땅했지요?”

“왜요?”

“다 알아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본걸. 그래도 내가 화장품을 산 것은...... 고향에 그이가 있어요.”

“담양에 애인이 기다리고 있어요?”

“기다리고 있을지, 산에 올라갔을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그를 만나러 갈 생각을 하니까 나도 모르게 화장품을 산거...... 이해하세요?”

석두는 잠잠히 있었다. 미스현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감사드리는 거예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난리통에 만난 것도 인연인데, 거절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으니 떳떳하게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석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인으로서 충분히 매력 있는 미스현을 찝쩍거리지 않고 하룻밤을 한 이불 속에서 아무 일 없이 지낸 것은 너무나 잘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