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두는 부산에서도 구도 동인들과 어울리고, 광주에 돌아가서는 광주서중 1~2년 후배인 박성용, 박봉우, 주명영, 정현웅 등과 어울려서 만든 영도(零度) 동인들과 시를 논하며 기세를 올렸다.
석두는 문예지의 신인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하는 것은 관심이 없었으나 원로 소설가이자 문예지의 리더 격이었던 김동리를 만나 따라다니며 술좌석에도 자주 갔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석두는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서 선배시인들과 소설가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하루는 광복동의 어느 대포집에서 소설가 김동리와 역시 소설가 김내성(金來成)이 논쟁 아닌 논쟁을 시작했다. 대중작가로 많은 독자를 가진 김내성이 김동리에게 불만을 터트렸다.
“민족문학이다, 순수문학이다 해서 문단을 당신들이 장악하고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특히 소설은 독자가 판단해야지 자기들끼리 해먹는 건 틀려먹었다." 하며 언성을 높이더니 당장이라도 조선일보에 동시에 연재를 해서 독자의 심판을 받자고 김내성은 언성을 높였다.
김동리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각기 분야나 장르가 다르며 독자층도 다른데 경쟁을 해서 뭐하느냐고 웃어넘겼다. 그래도 김내성은 분이 안 풀리고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석두는 영도 동인지에 시를 기고했고 후반기 동인들의 앤솔리지(anthology)라 할 수 있는 <도시(都市)>와 시민들의 합창>에 시 몇 편을 기고했다. 구도 동인들은 여전히 기세만 울릴 뿐, 이렇다 할 동인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겨울방학이 되어 광주로 돌아가려는 석두에게 오상원이 반공연맹에서 희곡모집을 하는데 같이 공동집필을 해서 응모하자고 제의했다. 석두는 현상모집을 하는 주최자가 ‘반공연맹’이라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고 또한 평소에 희곡을 쓴다고 말을 하고는 다녔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석두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광주로 되돌아왔다.
오상원은 혼자서 <녹스는 파편>이라는 희곡을 써서 백만 원 현상모집에 응시해 당선되었고, 술을 좋아하는 오상원은 새 학기가 시작되자 동인들을 끌고 다니며 술을 샀다. 술을 하지 못하는 석두는 오상원의 술좌석을 피하느라 진땀을 뺐다.
오상원은 거액의 상금으로 술 마시는 데 바빴고, 불문과의 클라스메이트인 장혜경과 연애를 하느라 더욱 바빴다. 오상원의 전성시대라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1951년 1.4후퇴로 서울이 중공군과 인민군 수중으로 들어갔으나 불과 몇 달 만에 인민군과 중공군은 북으로 후퇴하고 1951년 7월에는 북한군과 유엔군 사이에 휴전회의가 개최되었다. 북한으로서는 애당초 참전을 꺼렸던 중공군이 절실히 휴전을 원하니 따를 수밖에 없었고,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외쳤지만 역시 미국이 휴전을 원함으로 휴전회의가 개최될 수밖에 없었다.
휴전회의는 남쪽을 대표해서는 한국군이 아닌 유엔군이 나섰고 북쪽을 대표해서는 중공군은 뒤로 숨고 북한군이 나선 것이다.
휴전협상은 1951년 7월일에 시작해서 1953년 7월 23일에 성립되었으므로 무려 2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회의를 거듭했다. 휴전협상이 지루하게 진행되는 동안 전선에서는 격전이 거듭되었다. 서로 휴전선 책정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사력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휴전협상은 쉽사리 성사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실질적 당사자인 미국과 중공이 휴전을 원하는데 왜 휴전협상은 질질 끌려간 것일까? 그 배후에는 스탈린이 있었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의 조속한 휴전을 원치 않았다. 스탈린으로서는 한국전쟁은 한민족의 동족상잔의 전쟁도 아니요, 한반도에서의 국지전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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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상원(1980년) [출처 ; 동아출판사 / 한국소설문학대계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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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는 위장된 3차 대전, 비록 소련은 참전하지 않았지만 미국을 추종하는 20여개 국이 참전했고, 스탈린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는 북한과 중공이 소련을 배경으로 해서 싸우는 3차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었다.
소련은 미국이 한국전에 매달리는 틈에 동구라파 대부분의 나라를 소련의 영향 하에 두기 위해 힘을 썼다. 스탈린이 원하는 대로 소련의 영향력은 확대되어 갔고 거기에 반항하는 소수민족이나 국가는 가차 없이 무력진압을 했다. 그러니 스탈린으로서는 한국전쟁의 조기 휴전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스탈린의 동의 없이 한국전쟁의 휴전은 성립될 수 없었다.
한국전쟁의 막후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 외상 몰로토프도 한국전쟁의 휴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해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유엔군과 북한군은 휴전협정을 성사시켰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반대했지만 유엔군산하의 한국군은 휴전협정에 동참했다고 할 수 있다.
대학로 캠퍼스와 휴전협정
1.4후퇴로 중공군과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갔던 서울은 불과 두 달 만에 다시 유엔군에 의해서 수복되었다. 부산의 구덕산 천막교실에서 강의를 하던 전시연합대학 서울대학교 문리대는 대학로의 문리대 캠퍼스로 옮겨왔다.
6.25의 인민군 침공으로 부산으로 피난 간 문리대는 1952년 9월, 2년 만에 동숭동 캠퍼스로 되돌아온 것이다. 동숭동 캠퍼스에는 대학 도서관과 연구실이 있고 서울대학교 본부가 있었는데 대학본부는 후퇴하고 수복하는 과정에 미8군의 사령부가 있었으며, 1951년 겨을에는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인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곳에 머물렀다.
미8군 사령부였던 대학본부가 1952년 가을에는 다시금 상아탑의 기능을 되찾은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휴전협상은 꾸준히 이어졌으나 전선은 올라갔다, 내려왔다,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리한 휴전선의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혈전이 이어져 가고 있었다. 일선에서는 치열한 공방이 이어져가고 있었으나 격전지에서 불과 백여 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학캠퍼스에서는 정상적인 강의가 이루어졌고 시민들도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일상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전선은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으나, 공산군이나 유엔군이나 휴전을 앞두고 지나치게 전진하는 모험은 피한 것이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동부전선에서 보다 북방으로 밀고 가서 북한군이나 중공군이 서부에서 지나치게 남하하면 후방을 차단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가했으며, 서부전선에 주력부대를 전개하고 있던 유엔군은 임진강 이북으로 전진할 기세가 전혀 없었다.
휴전 협정을 앞두고 작전상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려는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나 큰 작전은 서로 피했으므로 전선은 소강상태라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서울을 비롯한 후방에서는 전쟁 와중에 평화를 누리는, 말하자면 위기 상황에 길들어가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회의만 거듭하면서 2년 동안 질질 끌어왔던 휴전협상도 스탈린의, 사망과 더불어 급진전했다. 스탈린은 휴전을 원치 않았다. 미국의 전략적 관심을 한국에 묶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