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후퇴와 금지된 장난 (25회)

수원 남방 3km의 마을. 민가의 골방에서 잠자리는 몹시 불편했지만 먹는 것은 궁하지 않았다. 리처드 중위가 갖다 주는 C-레이션 박스, 그밖에 많은 먹거리를 갖다 주고 목사 부인이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그런대로 먹는 데는 궁하지 않았다. 밥상을 받으면 목사 부인이 교대로 기도를 드리고 밥을 먹었다.

양 목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민족에게 가해진 고통과 수난이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내리신 시련이요, 은혜라고 했다. 석두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이 우리 민족에게 내려진 하나의 시련이라는 것은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은혜라는 표현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말이 되는 안 되든 모든 것을 하나님의 탓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한다면 편리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석두는 이곳에 내려와서 고민이 생겼다. 부대가 후퇴할 때 부대와 같이 후퇴해서 종군을 할 것인가, 전라도 광주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양 목사를 따라 부산으로 갈 것인가.

리처드 중위가 소속된 미군부대에는 현이라는 친구가 종군하고 있었다. 미스터 현은 양 목사와 석두에게 같이 후퇴해서 종군하자고 권했다. 전쟁이 장기화 될 것 같은데 기왕 입대할 거라면 미군부대에 들어가는 것이 더 편하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부대는 일단 원주로 후퇴해서 그 다음에는 일본으로 가서 낙하산 훈련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양 목사는 부대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목사로서 전투부대에 참가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과 고아를 돌본다는 사명감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미군부대에 종군하는 것을 단념한 것이다.

그러나 석두는 달랐다. 어디서 군 입대를 강요당할지도 모르며 광주 집에 가면 어떤 혐의가 씌워질지 몰랐다. 그렇다고 양 목사를 따라서 부산에 가면 아무런 연고가 없는 객지에서 속수무책일 것 같았다.

석두는 고민 끝에 부모님에 계시는 광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미스터 현에게 그 뜻을 전하고 리처드 중위에게도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부모님이 기다리시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1월 2일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마을에도 부쩍 늘어났다. 전면 후퇴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 유엔군의 후퇴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미스터 현은 여동생이라고 하면서 한 처녀를 데려왔다. 미스터 현의 고향이 담양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고, 여동생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여동생은 서울에 왔다가 오빠의 도움으로 서울을 미리 빠져나온 것이다.

1951년 1월 4일 예상한대로 임진강전선이 무너지고 유엔군의 후퇴가 시작되었다. 미군부대는 원주로 이동하고 석두와 목사일행 여덟 명은 오산으로 걸어갔다.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진다는 1번 국도에는 후퇴하는 미군 차량이 줄지어 달려와서 피난민들은 논두렁으로 걸어갔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들었다는 신작로에는 유엔군의 차량이 줄지어 남하하고 논두렁 길에는 흰 빛깔의 옷이 주조를 이룬 피난민들의 행렬이 하얗게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프랑스 영화 <금지된 장난>에서 본 것 같은데........ 그 전쟁 영화의 화면에는 그래도 일종의 서정미가 있었는데 석두가 바라본 그날의 화면은 그저 처참하기만 했다. 모두 말없이 걸었다.

석두와 목사 일행은 오산역에서 피난열차를 기다렸다. 피난열차가 수원역을 출발했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논두렁으로 걸어오던 많은 피난민들이 역으로 모여들었다. 피난민 열차는 곧 도착했다.

▲ 부산행 피난열차에 모여든 서울역의 피난민들 (1951. 12.14.)

열차에는 가득 탔다기 보다 가득 매달려 있었다고 할까, 객차의 천장위에는 하얗게 가득 매달려 있었다. 끼어들 빈자리도 끼어들 빈 공간도 없었다. 그러나 세 명의 고아와 목사 부인은 객차의 입구를 부비고 들어갔다.

미스터 현의 여동생도 부비고 들어갔다. 몸집이 작은 소년은 쉽게 끼어들 수도 있었고 여인들에게는 그래도 자리를 내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목사와 석두는 이곳저곳 시도했으나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기차는 출발의 기적을 울리는데 두 사람은 아직도 기차에 올라타지 못했다.

수원역으로 걸어갔어야 했는데 조금이라도 더 남쪽으로 가자고 오산역으로 내려온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되었다. 양 목사가 저쪽 화차(火車)로 가보자고 했다. 화차라기 보다는 석탄같은 것을 실은 무개차라서 피난민들이 올라타지 못한 것이다. 석두와 목사는 그 안에 무엇이 적재되어 있는지 확인하지도 한고 지붕이 없는 화물차의 칸막이를 넘어서 화차에 올라탔다.

무개화차에는 수십 마리의 젖소가 실려 있었다. 젖소들은 처음에는 침입자를 경계하듯 두 사람을 말끔히 쳐다보기만 하는 것 같았는데, 기차가 움직이자 마치 두 사람을 내쫓기라도 하여는 듯 뿔을 들이대고 밀어제쳤다. 젖소가 이렇게 심술궂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러나 저러나 이 젖소들은 여간 빽이 좋은 놈들이 아니다. 이 전쟁의 난리 통에 피난열차의 무개화차 5량을 독점 배당받고 남하하는 귀하신 몸들인 것이다. 젖소를 기르는 목장 주인은 대단한 빽이 있는 사람이 틀림없지만 젖소가 인간보다 귀하신 몸이라니 말이 안 된다.

석두와 목사는 젖소 칸에서 다시 나올 수도 없고 그래서 젖소들의 공격을 가까스로 방어하며 지탱했다.

겨울 해는 빨간 노을을 아쉬움으로 남기고 금방 기울어졌다. 피난 열차는 서서히 움직였다. 평택역을 지나 얼마가지 않아 열차가 정차했다. 왜 정차했는지 알수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남하하는 차량들도 줄어들었다.

기차선로와 국도와의 거리는 사오백 미터나 되어 보였다. 한 미군의 스리쿼터가 휘발유 드럼통을 싣고 달리고 있는데, 거기에 불이 붙었다. 스리쿼터 운전병은 처음에는 불이 붙은 것을 몰랐으나 이윽고 알아차린 듯 차를 세우고 달아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스리쿼터는 금방 화염에 휩싸이고 드럼통의 휘발유가 폭발하는 듯 엄청난 폭음과 함께 화염이 밤하늘에 치솟아 올랐다. 스리쿼터에는 세 개의 휘발유 드럼통이 있었던 모양으로 약 1분 간격으로 폭음과 함께 화염이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그 불꽃의 열기가 오백 미터나 떨어져 있는 피난열차에도 화끈하게 감지되었다.

1.4후퇴의 1번국도상에서 일어난 해프닝이라고나 할까, 그들은 ‘금지된 장난’을 하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인공적인 불꽃놀이와 비교가 되지 않는 박진감 넘치는 전쟁의 불꽃놀이였다.

석두는 논산과 연산 사이의 1번 국도에서 목격된 후퇴하는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산 중턱에 끝없이 수놓은 봉화가 떠올랐다. 후퇴하는 군대는 어떤 형태로든 불꽃놀이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