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해가 저물며 (24회)

크리스마스가 왔다. 석두에게는 크리스마스가 별다른 의미가 없었으나 목사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써전부스와 니콜라스도 고국에 있는 가족들 생각이 나는지 향수에 젖은 듯 보였다.

밤이 늦어서 한 양공주가 나타났다. 써전 부스와 써전 니콜라스는 서로가 양공주를 차지하려고 앙탈인 것 같았다. 석두와 목사는 3층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스가 차지하면 안 되는데, 니콜라스한테 양보해야지.”

니콜라스는 나이가 50이 다 된 것 같았고, 부스는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그러나 당연히 부스가 양보해야 한다는 게 목사님의 생각이었다. 그보다도 목사는 써전 부스를 미워했다. 써전 부스는 말끝마다 “지저스 크라이스(Jesus Christ)”라 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가 써전 부스에게 일종의 욕설이랄까, ‘빌어먹을!’ 하는 뉘앙스로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연발하는 것이다. 목사님은 저 자식이 예수님을 모독한다고 분개했다. 그래서 양공주가 저런 놈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바랐지만 양공주는 젊은 써전 부스를 따라갔다.

써전 니콜라스는 벽을 치며 슬퍼서 그러는지 화가 나서 그러는지 마치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저럴 수가. 미국 사람들은 단순해서 저럴까요?” 하고 석두가 말하자 목사님은 “미국 땅을 떠나서 이국 만리 전쟁터에 오니까 반짐승이 된 거지.”했다. 써전 니콜라스는 아마 크리스마스 이브 만큼은 쓸쓸히 보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크리스마스 날 점심에 내자아파트 식당에 자주 오는 리차드 중위가 양 목사를 불렀다. 아무래도 임진강 전선은 무너질 것 같다. 종공군의 총공세가 연내로 있을 것 같은데 유엔군의 작전은 또 다시 서울을 내어주고 후퇴할 것 같다고 리처드 중위가 말했다.

그래서 원한다면 양 목사와 석두를 내일이라도 부대가 있는 수원시 남쪽으로 데려다주겠다는 것이다. 양 목사는 전쟁고아 세 아이와 같이 원서동에 있는 아내가 걱정이라고 했다. 리처드 중위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오늘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부인과 고아들을 안전하게 이동시켜 놓을 테니 내일 오후에 수원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기다리라고 했다.

리처드 중위는 양 목사가 전쟁고아 세 아이를 돌보고 있다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원서동의 고아들을 위해 C-레이션 박스를 전달한 적이 있었다. 석두와 목사는 리처드 중위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서울이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어디로 후퇴할지, 식당이 해체하면 종업원들의 서울 탈출이 보장될지 알 수 없었다. 이러한 때 리처드 중위의 호의는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양 목사는 생각했다.

12월 27일 오후 석두와 양 목사는 리처드 중위의 지프차에 몸을 실었다. 안양으로 해서 역시 1번 국도를 타고 수원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에 안양을 지나 국도변에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는 입구에 지프차가 한대 세워져 있었다. 리처드 중위의 지프차가 그 지프차 뒤에 멎었다.

한 병사가 그 지프차에 옯겨 타고 발동을 가볍게 걸고 훔쳐 달아났다. 지프차가 달아나자 리처드 중위의 지프차도 그 뒤를 쫓아 급발진 했다. 뒤돌아보니 한 흑인병사가 뛰어나와 팔팔 뛰었다. 같은 미군끼리 지프차를 훔친 것이다. 리처드 중위는 우리차를 도둑맞았으니까 우리도 훔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임진강 전선이 붕괴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부대가 임박한 전면 후퇴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각 부대는 저마다 군장비를 챙기기 위해서 지프차 같은 것을 서로 훔치는지도 모른다.

▲ 한국전쟁 당시 지프차를 타고 이동하는 미군

리처드 중위가 속해 있는 부대는 수원을 지나 오산방향으로 약 2km 지점에 있었으며 전날 도착한 목사 부인이 고아들 셋과 같이 민가의 한방을 빌려 놓고 있었다.

방은 네 칸 정도의 골방이었으나, 좁은 대로 목사부부, 고아 셋 그리고 석두 여섯 사람이 동거를 시작했다. 아침, 저녁으로 목사부부와 고아들은 찬송가를 불렀다.

“그곳은 빛과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곳은 빛과 사랑이 가득하다면 반대로 이곳은 어둠과 미움, 증오가 가득하단 말인가? 왜 하나님은 이곳을 빛과 사랑을 충만 시켜주지 않고 민족을 갈라놓고 싸움의 구렁으로 우리를 몰아넣는가? 석두는 찬송가를 부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하나님이 꾸민 일이지만 어이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왜 그들은 나라를 분단하고 민족을 분열시키고 우리는 잘 모르는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해서 왜 싸워야 하는가? 트루먼은 형편없는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이긴 전쟁을 맥아더 장군을 해임시키고 중공군의 참전을 유도해서 또 한 번 우리를 골탕 먹이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는가?

김일성으로 하여금 조국통일의 환상을 갖게 하고 남침을 유도한 것이 트루먼 본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 중공군의 참전을 유도한 것은 분명 트루먼이라고 할 수 있다.

장개석의 대만정부는 본토 수복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트루먼은 본토 탈환을 시도하지 말라고 장개석에게 경고하고 장개석의 작전을 봉쇄하기 위하여 미국7함대를 대만해협에 들어가도록 명령했다.

또한 장개석은 3만 3천명의 한국전 파병을 제안했으나 트루먼은 이를 거절했다. 장개석의 대만은 당시 유엔국의 회원국이었으므로 당연히 유엔군에 참가할 권리와 의무가 있었으나 트루먼은 이를 거절한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어이없는 정책은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용이하게 해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둘째로 만주폭격뿐만 아니라 만주와 북한을 연결하는 철교나 다리를 공격할 수 없도록 맥아더에게 지침을 내림으로써 중공군은 참전을 하더라도 보급로가 안전하다는 것을 여러 정보를 통하여 알고 있었다.

그들은 트루먼의 일련의 조치에 안심하고 한국전에 참전할 수 있었다. 종공군의 참전은 한국전의 승패와 향방을 또 다시 예측할 수 없는 안개 속으로 끌어들였지만 중공군의 참전을 유도한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이라는 생각을 석두는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마음고생은 얼마나 컸겠는가.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승만 박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고 민주주의가 몸에 배어 있어야 하는 그가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국회와 대립하면 권력에 집착하는 독재자의 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난 이후의 이승만 대통령의 언동에 민족적 공감이 간다고 생각되었다. ‘뭉쳐야 산다’는 외침은 6.25전에는 정략적 외침으로 공허하게 들렸지만 6.25와 더불어 그의 외침은 민족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진실로 메아리쳤다.

‘북진통일’을 외치는 이승만의 언행에는 진실이 있었다면 3차대전이 두려워서 유엔군의 손발을 묶고 흥남철수작전, 그리고 서울을 또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하는 임진강 전선의 붕괴로 유도한 트루먼의 언행에는 진실이 없다고 석두는 생각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트루먼은 광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