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다바이를 만나다 (20회)

삼선교는 통행금지 시간 전에 걸어갈 수도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 시간에 여관을 찾아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카빈총을 짊어지고 한 군인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삼선교의 형님 집에 가는데 이 시간에 갈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군인은 자기가 돈암동으로 가는데 같은 방향이니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한 중년신사가 자기도 삼선교에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통행금지 시간에 걸려도 군인이 같이 가면 문제없다고 했다.

석두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카빈총을 맨 군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군인은 트렁크가 무겁지 않느냐고 물었다. 석두는 큰 트렁크를 앞뒤로 흔들어 보이며 가볍다고 했다.

화신백화점 근처에 와서 군인은 잠시 들렀다가 갈 곳이 있다며 인사동 뒷골목의 가게에 들렀다. 군인은 육군본부에 근무하는 이성수라고 했다. 돈암동 OO번지가 집이라고 했다. 가게에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십오 분쯤 머물렀다. 나와서 종로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화신백화점 건물에는 헌병대가 있었다. 화신백화점에서 약 백 미터쯤 걸었을까. YMCA건물 앞을 지났을 때 검정색 양복을 입은 신사가 나타나서 육군에 근무하는 군인과 시비가 붙었다. 왜 시비가 붙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검은 신사복의 사나이는 권총을 빼어들고 군인은 카빈총을 겨누고 금방이라도 총격전이 벌어질 것 같은 순간이었다.

중년 신사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헌병대에 연락하라는 몸짓을 하는 것 같았다. 석두는 쏜살같이 뛰어서 헌병대에 위급한 상황을 설명하고 헌병을 대동하여 현장에 뛰어왔다. 그러나 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빈총을 겨누고 권총을 빼어들고 다투던 두 사람과 중년신사는 깜쪽 같이 사라진 것이다. 불과 오 분도 안 되는 시간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들은 깜쪽 같이 사라지고 넓은 종로를 군용차가 때때로 달려갈 뿐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석두는 같이 왔던 헌병을 따라 현병대로 돌아왔다. 깜쪽같이 세 사람이 사라지고 석두의 트렁크도 자취를 감추었다.

헌병대와 당직 장교는 석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직 장교는 석두를 아래 위로 살펴보며 나이를 물었다. 스무 살이라고 했다. 헌병장교는 “설마 서른 살은 되어 보이는데........” 석두는 여행자 증명을 내보이며 만 열아홉, 그러니까 스무 살이라고 했다. 당직 장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석두가 서울로 올라올 때 어머니가 회색 양복을 맞추어 주었는데, 그때 유행하던 마카오신사들이 입는 큰 에리(깃)의 양복이 아니라 에리가 좁은 구식 양복이었다. 그래서 당직 장교는 석두를 서른 살로 본 것이다. 잘못하면 허위신고를 하는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될 뻔 했는데, 당직 장교는 통행금지 시간이 넘어서 갈수 있는 야간통행증명서까지 만들어주었다.

삼선교의 형님 집에 트렁크를 잃어버리고 맨손으로 도착한 것은 새벽 두시였다. 이튿날 아침 석두는 의과대학에 다니는 형님과 함께 어젯밤 잃어버린 트렁크를 찾으러 나섰다.

▲ 한국전쟁 직후 화신백하점 / 전화(戰禍)로 건물이 검게 그을러 있다 [ⓒNARA 출처 ; 오마이뉴스]

트렁크 안에는 군산시장에서 판 광목 두필의 대금 14만원만이 아니라 어머니가 어려울 때 팔아 쓰라며 주신 금팔찌, 금반지 등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잃어버리다니, 아니 도둑맞았다니 말이 안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지난밤에 들린 화신 뒷골목의 점포로 가봤다. 점포는 굳게 문이 닫히고 인기척이 없었다. 육본에 근무한다는 이성수, 그가 언제 적어주었는지는 모르지만 돈암동 산102번지라는 주소가 적혀있는 쪽지를 들고 돈암동 일대를 찾아다녔으나 산 102번지는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육군본부로 찾아갔다. 육군본부는 을지로 입구 쪽에 있었다. 육군본부에 가서 무조건 이성수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어젯밤 가게에서 그들이 이야기하던 가운데 영선보급과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아 찾아간 것이다.

이성수는 과연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찾았다고 기대에 부풀어 기다리고 있는데, 이성수라고 나타난 사람은 어젯밤의 그 군인이 아니었다. 석두는 그 제서야 네다바이에 걸렸구나하는 것을 깨달았다. 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등처 먹는 네다바이 조직의 범죄에 걸려든 것이었다.

평상시에 이런 일을 당했다면 경찰에 신고하고 추궁해볼 만도 하지만 어지러운 전시에 그런 범죄에 관심을 갖는 경찰력은 없었다.

“이상한 트렁크를 들고 다니니까 네다바이 조직이 그 트렁크를 노린 건지... 아니면 군 정보계통이 수상한 트렁크를 노렸는지도 모르고, 하여튼 강도를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강도를 만나면 다 털리고 생명까지 위험해.”

형님은 입맛을 다셨다. 석두는 쉽게 번 돈은 쉽게 날린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광목 판 돈은 그렇다 치고 어머니의 금반지와 팔찌까지 잃어버렸으니 그런 귀중품은 따로 관리했었어야 했다고 석두는 생각했다. 군산에서 더 기다렸다가 서 의원 일행을 따라왔어야지 트럭에 몸을 실은 것은 경솔한 선택이었다고 후회했다.

의심하려고 드니 그 트럭도 범죄 조직에 속해있는 차량이었는지 모른다. 이것저것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을 추리해볼 때 사회 전체가 거대한 범죄조직에 얽혀있다는 망상에 가까운 생각마저 들었다.

의과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형님은 공군 군의관으로 특채되어 비행장에 갔다. 석두는 옥인동에 있는 형수님 댁에 가 있기로 했다. 달리 가 있을 곳이 없으니 할 수 없이 옥인동 형수님 댁에 갔지만 형님의 처갓집에 기숙한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한편 국방군과 유엔군은 서로 앞을 다투어 평양으로 진격했으며 인민군은 평양을 포기하고 압록강변 국경으로 후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