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 타고 흘러온 얘기
석두는 자신이 겪은 6.25 전쟁을 어떤 식으로든지 증언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영화 제목으로 <침묵은 황금>이라는 게 있는데, 전쟁은 ‘휴전’일뿐 아직 끝나지 않았고 사회적 갈등과 이념의 갈등이 언제 충돌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입을 열면 어떤 위협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미루고 미루어서 반세기가 지나갔다.
생각하면 많은 위기를 침묵과 위장으로 잘도 넘기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끝까지 침묵을 지키고 만다면 억울하게 떠나간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고 석두는 생각했다. 그들을 위해서도 뭔가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반세기가 속절없이 지나간 것이다.
석두는 비슷한 상황에서 6.25를 겪은 선배나 친구들에게 체험담을 해달라고 했다. 6.25전쟁 직후 대학 극서클에서 뵌 적이 있는 선배 연극인 최창봉, 조동화, 이병복, 김지헌, 김석하 등으로부터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며 주저했으나 한번 입을 열고 애기를 시작하면 털어놓고 얘기한 것이 시원하다는 듯이 얘기를 이어갔다. 석두는 그들의 얘기를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겠다고 허풍을 떨었다. 그러나 내심 연극이나 영화로 재현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하고 극적 구성이 힘들다고 생각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돌체다방에 자주 모이던 젊은 연극인 또는 지망생은 하나의 등장인물 집단으로 설정될 수 있지만 그 다음은 시간과 공간이 너무나 산만하게 펼쳐져서 극적인 예술작품으로 구성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대하드라마나 장편소설로 구성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세월은 흘러서 석두에게 6.25체험담을 해준 최창봉, 조동화, 이병복, 김지헌, 김석하, 다섯 분이 다 떠나셨다.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죽이되 든 밥이 되든 뭔가 내놓아야겠다고 석두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 자주 들은 얘기를 ‘녹슨 파편’의 종막으로 기억의 광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남기려 한 것이다. 말하자면 바람결 타고 흘러온 얘기를 엿들었다고나 할까. 엿들은 얘기를 잊어버리기 전에 재구성해본 것이다.
허무한 다도해의 낭만 ; 조동화
조동화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월남해서 약학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서울대학의 약대는 열심히 공부하고 꽤 성적이 좋아야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어려운 관문을 뚫고 약대를 들어간 것은 약대를 졸업해야 안정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삼팔따라지 신세에...... 사람들은 월남해온 사람을 삼팔따라지라 했다. 38선을 넘어왔다고 해서 ‘삼팔’이고 삼팔은 화두의 끗발로 한 끗을 따라지라 하므로 ‘삼팔따라지’, 삼팔선을 넘어온 끗발 없는 빈털터리들을 ‘삼팔따라지’라 한 것이다.
장래 안정된 생활을 위해 약학대학을 다니지만 취미나 하고 싶은 일은 딴 데 있었다. 명동에 있는 함귀봉(咸貴奉)무용연구소에서 연극을 한다는 김경옥(金京玉), 최창봉(崔창鳳) 등을 알게 되면서 고대생(高大生)이 아니면서 고대극회의 공연에 스태프로 또는 열성적인 관객으로 참가했다.
고대 연극을 처음 본 것은 아일랜드 작가 ‘숀 오케이시’의 <주노와 공작>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왔다는 이진순(李鎭淳)의 연출도 좋았지만 무용연구소에서 사귄, 보일 선장 역을 맡은 김경옥과 아즐 조니 역의 최창봉의 연기가 뛰어나다고 조동화는 생각했다.
연극의 배경은 아일랜드 독립내란이 있었던 1922년경 더블린 빈민가인데 그러한 배경이 우리의 풍토와 통하는 데가 있어서 큰 공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조동화는 매일같이 공연을 보러가서 분장실로 찾아가 감탄사를 늘어놓으며 격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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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 회령의 한 초등학교를 졸업한 월간 춤 발행인 조동화 선생(오른쪽, 작고)과 최남단의 초등학교를 다녔던 석두가 전라남도 해남 땅끝 마을 송지초등학교에서 마치 통일이라도 된양 기쁜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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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화는 약대를 다니며 문리대 생물학과에서 이 교수의 조교로 일을 했지만 조동화의 정신생활이랄까, 정서적 일상생활에서 무용과 연극이 차지하는 비중이 제일 컸다.
6.25가 터지고 26일 아침이 되자 낙천적인 조동화도 약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평양에서 점심 먹고, 신의주에서 저녁을 먹는다.’던 국방군이 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조동화는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는 김경옥과 최창봉이 걱정이 되었다. “이러다가 연극도 못하는 것 아니야?”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박남표 소령이 지프차를 몰고 찾아왔다.
박남표 소령은 회령(會零)에서 같이 월남한 친구다. 그는 빨리 지프차에 타라고 했다. 새로운 작전사령부 하나를 전라도 광주(光州)에 만들기로 되어 있어 급히 내려가니 같이 가자는 것이다.
“갑자기 어딜 가니, 가족들한테 알려야 하고.”
“야 여러 말 말고 빨리 타! 나도 가족들 놔두고 가는 거야!”
조동화는 엉겁결에 지프차에 올라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에서는 곽남수라는 여인의 집으로 갔다. 곽남수는 드물게 보는 미인이었다. 큰 한옥을 차지하고 혼자 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청상과부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박남표는 재주도 참 좋다. 이런 미인을 여자 친구로 삼다니.......”
여인이 잠자리를 깔아주었다. 그렇게 호화로운 이부자리를 깔고 자는 것은 처음이었다.
‘광주 부잣집은 대단하구나.’
6월 28일 아침에는 벌써 서울이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 있다고 했다
‘전쟁이 터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더니 거꾸로 당했구나 하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박남표 소령의 말에 의하면 호남지방 작전사령부를 설치하려는데 M1 소총 몇 자루 그리고 일본식 구식 소총이 백여 자루 그리고 일본군 군도(軍刀)가 몇 자루밖에 없다고 했다.
김일성은 한 달이면 부산까지 밀어붙인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정말 이러다간 그렇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가족들이 걱정이고 친구들 소식도 궁금했으나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남표 소령은 다시 부산으로 후퇴한다고 했다. 전열을 정비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려야 한다는 것이다. 박남표 소령은 군부대와 같이 이동하고 조동화에게는 여수로 가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라고 했다. 부산에 가면 국제시장에 친구가 있으니 찾아가라고 하면서 그에게 전달하라고 돈뭉치도 동화에게 맡겼다.
조동화는 여수로 가서 부산으로 가는 LST(상륙함)에 승선했다. LST는 누구나 승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박남표가 만들어준 군인가족 증명 덕택으로 승선할 수 있었다. LST는 빨리 부산으로 가지 않고 이곳저곳을 들른 후 일주일이나 걸려서 부산항에 도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