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복된 서울에서 (23회)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이승만 대통령도 북진통일의 꿈이 헛된 꿈이 아닐 수 있다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의기투합하던 맥아더 장군이 트루먼에 의해 해임되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를 거듭함으로써 북진통일은 하나의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사람은 미국에서 한 사람은 소련에서 귀국한 독립투쟁의 두 영웅은 뼈저린 좌절감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북쪽의 김일성 수상과 남쪽의 이승만 대통령의 꿈이 깨지고 목표가 없어진 이상 한국전쟁은 무의미한 전쟁이요, 한반도를 전쟁터로 제공하고 있을 뿐 우리와는 관계없는 전쟁이라는 생각을 석두는 지울 수가 없었다.

병사가 되어 무의미한 전쟁의 소모품이 되는 것도 싫지만 전쟁의 노무자가 되어 참호를 파는 것은 더욱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염치없이 사돈댁의 식객으로 언제까지 있을 수도 없고 해서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잠깐 있었던 명륜동의 하숙집에 가보기로 했다.

옥인동 골목을 나와 효자동을 거쳐 내자아파트가 바라다 보이는 좁은 자동차길을 걸어 내려왔다. 저만치 네거리에서 검문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석두는 재빨리 통의동 골목길로 해서 중앙청으로 빠져나갈 생각으로 더듬더듬 걸어갔다. 모양이 예쁘다고 할까, 품격이 있는 백송(白松)나무가 전화(戰禍)를 면하고 의연하게 서 있었다.

‘소나무까지 폭격할 필요야 없었겠지.’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중앙청 앞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한 청년이 급히 걸어왔다. 처음에 두 사람은 경계하듯 살폈으나 서로 비슷한 처지라는 것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 소로 뜻하지 않게 치부를 보였을 때의 얄궂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쪽에서도 검문해요? 저쪽에서도.......”

두 사람은 검문이 풀릴 때까지 골목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청년은 석두보다 연상이었는데, 목사라고 했다. 그는 명륜동까지 가는 것은 밤이라면 몰라도 낮에는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는 원서동에서 왔는데 이리저리 피해서 겨우 왔다고 했다. 그가 여기까지 온 것은 미군과 유엔군 장교들 그리고 종군기자들 전용식당이 내자아파트에 있는데 거기에 일자리가 없을까 해서 왔다는 것이다.

석두도 내자아파트에 어떤 시설물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장교와 종군기자들이 드나든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기에 몸을 숨길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외국기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석두는 젊은 목사를 따라 내자아파트로 갔다. 경비가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으나, 젊은 목사가 어디에서 이름을 알았는지, “써전부스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들어가게 해주었다.

써전부스를 만나서 무슨 일이든지 할 테니 일을 시켜달라고 사정을 했다. 써전부스는 써전 니콜라스와 함께 내자아파트의 장교식당을 관리하는 특무상사다. 써전부스는 우리가 간단한 회화는 할 수 있는 영어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써전 니콜라스와 몇 마디 상의하더니 당장 오늘저녁부터 웨이터로 일을 하라고 했다.

▲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1950. 11. 1.) [출처 ; 오마이포토]

마침 이용하는 장교와 기자들의 숫자는 늘어나는데 웨이터가 부족해서 곤란했는데, 잘되었다고 했다. 웨이터가 하는 일이 석두와 젊은 목사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메뉴에 있는 음식을 주문받고 가져다주면 그만인데 첫날에는 약간의 혼란이 없지 않았다.

네 명의 웨이터가 음식주문을 받고 왔다 갔다 하는데,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도 교통질서가 있다고 할까 동선(動線)이 정해져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충돌하고 음식접시를 떨어뜨리는 불상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날 저녁부터 석두와 젊은 목사는 내자아파트의 3층에 있는 홀에서 다른 종업원들과 함께 합숙을 했다. 석두는 그동안 인민군 점령 하에서는 매일 보리밥만 먹었고, 서울에 와서 도 결코 잘 먹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유형의 시골집에서 추어탕을 매일 먹었을 때를 빼고는 전시(戰時)이니까, 비상시국이니까 하고 참아가며 채식위주의 식생활을 했다.

그런데 내자아파트에 와서부터는 달라졌다. 매일같이 비프스테이크다, 햄버거다, 치즈다, 전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호화판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유엔장교나 종군기자들도 내자아파트에 오는 날은 잘 먹기 위해 오는 날이라고 했다.

석두는 그동안 매일같이 변소에 가서 큰 덩어리를 배설했는데, 내자아파트에 와서는 삼일에 한번 쯤 변소에 가고 그것도 염소똥 같은 작은 덩어리를 배설했다. 채식위주로 먹다가 갑자기 육식으로 전환하니 변비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석두는 변비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의 채식이나 보리밥은 영영가가 없으니까 흡수될 것이 없어 큰 덩어리의 변으로 배설되고 미국 음식은 영양분이 많아서 다 흡수되니까, 염소똥 같은 작은 변으로 배설된다고 생각했다. 변이야 어떻든 석두도 내자아파트에 와서 얼굴 빛깔이 달라졌다.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한 끝에 서부전선은 임진강을 방어선으로 고정시키는 듯 했다. 강원도의 동부전선은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임진강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기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중공군은 쉽사리 임진강 도하작전을 펼 수 있지만 인민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이것저것 재고 있다고 또는 임진강이 결빙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저러나 전세는 남쪽이 불리한 것 같았다. 수적으로 절대 우세한 중공군이 대공세를 편다면 또 다시 서울을 내주고 후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서투른 몇 마디 불어로 친분이 생긴 APP통신기자는 중공군을 막으려면 일본군이 참전을 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석두에게 물었다. 석두는 워커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본 자위대의 참전에 대하여 이야기 하자 일본군이 이 땅에 오면 우리 군은 공산군보다 일본군하고 싸우겠다고 답했다는 신문기사를 상기했다.

석두는 프랑스 기자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일본군에 대한 이러한 정서는 대부분의 국민정서라고 설명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 아닌데, 하고 프랑스 기자는 한심스런 표정을 지었다가 국민정서가 그렇다면 따라가야지 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큼 전세가 불리한 것 같았다.

1950년 한 해가 전쟁으로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