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박헌영
1950년 10월 15일, 김일성의 지하 집무실. 김일성과 박헌영이 마주 앉아 있다.
김일성 : 벅헌영 동지! 미군이 38선을 넘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동무 예측과는 달리 38선을 그대로 넘어서 평양으로 진격해오고 있어요. 동지의 의견을 듣고 싶소.
박헌영 : 일단 후퇴해서 전선을 재정비해야지요.
김일성 : 그걸 말이라고 하오. 평양을 버리고 가면 어디로 가겠소. 전선을 정비해서 싸운다는 것은 어림없으니 모두 산으로 들어갑시다.
박헌영 : 산으로 들어가요?
김일성 : 그렇소. 산으로 올라가 유격전을 전개하는 거요. 일본군과 싸웠을 때처럼 산에 올라가 유격전을 전개하면 미군과 국방군 놈들은 골탕 먹일 수가 있소!
박헌영 : 그건 안 됩니다!
김일성 : 왜 안 되오! 동무는 유격전에 참가해본 적이 없으니까. 편안하게 숨어서 지령이나 내리고 있으니까 투쟁이 뭐라는 걸 모르는 거지. 이제는 산으로 올라가 유격전으로 버텨야 하오. 동무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진짜 투쟁이 뭐라는 걸 배워야 해!
박헌영은 약이 올랐으나 참았다.
박헌영 : 수상동지. 수상동지의 영웅적 투쟁은 언제나 찬양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산에 올라가 전면적 유격전을 전개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유격전으로 전환하면 중국의 해방군이 우리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김일성 : 중국의 의용군이 우리를 도우려면 벌써 도왔어야지. 우리가 낙동강까지 쳐내려갔을 때 했어야지. 그러면 깨끗이 끝나는데.
박헌영 : 그때는 명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놈들이 38선을 넘었으니까 중국의 해방군이 참전할 명분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김일성 : 무슨 얼어 죽을 명분이요. 해방군의 참전을 통보해온지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아직 소식이 없소. 평양에서 우리가 후퇴하기 전에 파병을 해줘야지. 우리가 낙동강까지 진격했을 때....... 동무의 지령을 믿고 움직인다는 빨치산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동무가 스탈린 동지 앞에서 말하던 20만 명의 남로당 당원들은 다 어디로 숨었는가? 우리가 쳐내려 가면 일제히 봉기한다고 했는데 다 헛소리 아니요? 동무의 허황된 말을 믿고 쳐내려갔는데 미국놈들 함정에 빠진 격이 아니요?
박헌영 : 낙동강까지 내려간 것은 잘못된 작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보 전진, 이보후퇴, 서울을 점령한 시점에서 뭔가 새로운 작전이 필요했는데, 낙동강까지 쳐내려간 것은 적의 유인작전에........
김일성 : 그걸 말이라고 하오? 서울에서 며칠 동안 꾸물럭거리고 시간을 보낸 것이 패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낙동강까지 진출한 게 잘못이요?
박헌영 : 보급로가 길어지면 정규적인 작전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았어야지요! 무작정 전진할 게 아니라 그때야말로 유격전으로 전환해서 남쪽 당원들과 빨치산이 봉기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고 싸웠어야지요.
김일성 : 그런 무책임한 변명이 어디 있소! 우리가 쳐내려 가면 일제히 봉기해줘야지 우리가 해방시킨 연후에 그렇게 나타나는 건 기회주의자들 아니요? 게다가 미군이 그렇게 전면 개입해올지 누가 알았겠소. 인민군 총사령관으로서 작전에 잘못이 있었다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작전에 오류를 범하게 한 허황된 정보를 제공한 동무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하오!
박헌영 : 제가 져야 할 책임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모택동 동지와 주은래 동지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려서 참전해올 것입니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못마땅하게 노려봤다. 이자는 지금은 이용가치가 있지만 전쟁이 끝나면 모든 책임을 이 자에게 덮어씌워 숙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일성 : 잘못을 통감한다면 좋소.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그러나 지금 당장 어떻게 하면 좋겠소? 산에 올라가 유격전을 펼치는 걸 반대한다면 여기서 끝까지 버티자는 거요?
박헌영 : 아닙니다. 미군과 국방군이 평양을 목표로 진격해오고 있으니 일단 후퇴해야 합니다. 수상동지께서 일단 만포진으로 후퇴하셔서 전선을 정비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중국 의용군도 참전하는데 명분이 서고 반격을 위한 작전도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수상동지의 지시를 받아 내무상 박일우를 대동하고 중국에 가서 조속한 파병을 다시 한 번 간곡히 요청하겠습니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이 자는 아직까지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일성 : 그렇게 하시오! 위급한 상황을 설명하고 더는 늦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야 하오!
박헌영 : 알겠습니다.
김일성은 초조하게 실내를 왔다갔다 하다가 다시 불쑥 입을 열었다.
김일성 : 부수상 동지! 동무의 책임이 막중하오!
박헌영 : 네? 제 책임이......?
김일성 : 우리의 강력한 인민군이 요즘 사기가 말이 아니오. 도피와 투항, 잠적이 속출하고 있다고 하오. 명령을 거부하는 놈들도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소! 사상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요. 다 누구의 책임이요?
박헌영 : 네?
김일성 : 다 동무의 산하에 있는 정치국 장교들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박헌영 : 제 산하에는.......
김일성 : 알고 있소! 그래서 우리 인민군의 기강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사상무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총정치국장을 창설하도록 하오.
박헌영 : 네....... 그렇게 하시는 것이........
김일성 : 총정치국장을 창설해서 그 책임을 박헌영 동지가 맡도록 하오!
박헌영 : 네, 제가?
김일성 : 동무의 책임이 마땅하다고 하지 않았소. 당장에 돌아가서 인민군 내의 정치국 역할을 어떻게 하면 강화할 수 있고 사상무장을 강화할 수 있는지 연구하고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하오!
박헌영 : 알았습니다.
김일성 : 그만 돌아가시오. 만포진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박헌영 : 네........ 수상동지께서는 언제......?
김일성 : 오늘당장 출발할까 하오. 뒷정리가 되는대로 만포진으로 오도록 하오.
박헌영은 어리둥절 해서 김일성의 집무실을 나왔다. 김일성의 패전의 책임을 자신에게 뒤집어씌운다고 생각해서 반발했는데, 갑자기 인민군 내에 총정치국을 창설하고 그 책임을 맡으라고 하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평양을 포기하고 국경도시로 후퇴하려는 이 위급한 상황에서 총정치국을 창설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니, 김일성은 만만치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