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부대에서 군복무 (7회)
  제1장 가족이라는 울타리

1961년 2월 7일, 나는 군대에 입대했다. 또래들보다 2, 3년 빠른 편이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배치된 곳은 화천에 있는 27사단 보충대였는데, 거기서 일주일동안 있다가 곧 79연대 풍산리로 배치되었다. 

인사과 참모인 연대 부관은 내가 어려 보여서인지 나를 의무중대로 발령 내더니 즉시 연대1과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생활은 연대본부중대에서 하라고 지시했다. 그곳에서 8개 월 가량 근무했는데, 어느 날 연대부관이 선임하사를 통해 내게 미군부대를 가겠느냐고 물어왔다. 그즈음 연대 부관은 같은 연대 대대장으로 가게 된 모양이었다. 나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좋다고 대답했다. 

미군부대로 발령을 받게 된 내게 2박3일 간의 짧은 휴가가 주어졌다. 그때 서울에 사는 친구 이원범이 떠올랐다. 고향 친구인 이원범은 당시 종로 5가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위였지만,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였다. 마땅히 갈 곳도 없던 나는 휴가 내내 이원범과 같이 지냈다. 

부대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짐을 챙기고 있는데, 언제 사가지고 왔는지 이원범의 손에 백화수복 2병이 들려 있었다. 그는 선임하사에게 갖다 주라며 백화수복을 내밀었다. 대용량의 백화수복은 유리병에 담겨 있어서 제법 무거웠다. 이것을 서울에서 화천 풍산리에 있는 부대까지 갖고 가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백화수복은 당시 마개 부분이 잘 떨어져 깨지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신주단지 모시듯 가슴에 품고 조심스럽게 가지고 가야 했다.

부대에 들어간 나는 곧장 선임하사에게 백화수복을 건넸다. 선임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그 술병을 받아들고 사물함에 넣었다. 그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얼마 후 나는 일산 봉일천에 있는 미군부대로 옯겨 갔다. 1년 정도 있을 무렵 선임하사가 내가 근무하고 있는 미군부대로 찾아왔다. 나는 미군부대에서 병참물을 취급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선임하사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었다. 선임하사는 나에게 미군 측에서 한국군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침구를 가져가는 바람에 지금 부대에 침구가 부족해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나는 알아보겠다고 하고 미군 중대장에게 보고를 했다. 미군 중대장이 한참을 망설이더니 “우리도 지금 물품이 부족하다. 하지만 네가 요령껏 준비하면 내가 지원하도록 하겠다.”라는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 나는 재주껏 헌침구를 구입해 병참부대에서 새것으로 지급받아 그것을 선임하사가 있는 부대로 갖다 주었다. 

당시에는 미군부대 주변에 있는 한국부대를 이런 식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일이 고마웠는지 선임하사는 나를 부대 근처에 있는 한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선임하사가 데리고 온 중대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선임하사는 나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미군부대를 가라고 했더니 글쎄 휴가에서 돌아오면서 백화수복 두 병을 사가지고 왔더라고.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이야.” 
 
▲ 봉일천 제1기갑사단 시절

선임하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막 웃기 시작했다. 중대원들이 웃는 것을 보고서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선임하사가 나에게 휴가를 보내준 것은 돈을 좀 마련해서 가져오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돈은커녕 엉뚱한 술을 내밀었으니,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원범은 내가 미군부대로 발령 난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그래도 성의표시라고 하라고 돈 없는 나를 위해 백화수복을 사준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뜻을 젼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순진했다. 이원범도 술을 사주면서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기에 나는 선임하사에게 그 말을 듣기 전까지 그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미군부대에서는 한국군대에 있을 때보다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근무를 하고나면 주말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게다가 근무지인 일산 봉일천에서는 서울로 나가는 교통이 편리했다. 나는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간 하지 못한 학업을 잇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토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학원을 다니며 고등학교 편입준비를 했다. 

화천에 계속 있었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고등학교 편입에 필요한 영어는 미군부대에 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나는 미군부대에서 제대한 바로 다음 날인 1963년 12월 8일 한영고등학교 야간에 편입학했다. 

고등학교를 편입학 하는 과정에서 이원범은 내게 힘이 되어주었다. 토요일마다 서울로 학원을 다니면서 나는 이원범이 일하는 세탁소를 가끔 찾아갔다. 그가 일하는 세탁소에는 내 또래의 친구들이 자주 드나들었는데, 조장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서울대를 다니고 있던 조장호는 이원범과 마찬가지로 나와 중학교 동창이었다. 

조장호를 만난 자리에서 내가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하자,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학교를 왜 가려고 해?”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원범이 나보다 먼저 나서서 “야 임마, 너는 학교에 다니니까 그렇지.”라고 하면서 쓴 소리를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나에게 실로 중요한 일이었다. 또래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굳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자 한 이유는 신학교를 가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품은 꿈을 이루기위해서는 아무리 늦었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조장호는 나중에 신문사 편집국장도 하고, 원주에 있는 대학의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동안 나는 조장호와 가끔 만났지만 그때 일을 꺼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마 자신이 그런 소리를 했다는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이원범도 당시 대학생이었다. 그는 세탁소를 하면서 동국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 욕도 잘하고 입담도 걸쭉한 그가 특별히 잘 하는 것은 상여소리였다. 그런 재주 탓에 그는 구류를 살기도 했다. 

1964년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박정희를 반대하는 집회인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원범은 그 장례식의 맨 앞에 서서 상여 앞잡이 소리를 했다. 이 일로 그는 서울대생 주동자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구류를 살게 되었다. 이 장례식은 서울대 운동권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으나, 이원범이 상여소리를 잘해서 같이 하게 된 것이다. 

이원범은 나중에 정계에 입문하여 11대, 15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9년 7월 자택부근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7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집을 떠나다 (6회)
  한영고와 한신대 (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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