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가 17년 만에 부활절 연합예배를 남산야외음악당에서 드리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부활절연합예배는 1946년 해방의 기쁨을 안고 전국의 교인들이 다 함께 모여서 드리던 예배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이후로는 에큐메니컬 측(KNCC)은 배재고등학교 교정에서, 복음교회 측은 덕수궁 중화전에서 따로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나는 1973년에 열리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으며, 이를 바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느꼈다.
1972년 2월 KNCC 총회에서 김관석 목사의 재임이 결정된 후 나는 인사 차 김 목사를 찾아갔다. 그는 나를 굉장히 반겼는데, KNCC와 보수 측인 대한기독교연합회(DCC)가 다음 해에 부활절 연합예배를 함께 드리게 된 것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관석 목사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집을 사랑방 삼아 뜻 있는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고 대화하기를 즐겼다.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늘 사람들을 불러다가 같이 만나서 편하게 이야기 하게 해주었다.
김 목사의 자택 사랑방에는 일본의 오재식 선생, 캐나다의 이상철 목사, 미국의 이승만 목사와 손명걸 목사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하비, 독일의 슈나이츠 등도 자주 드나들었다. 이렇게 외국에서 손님이 올 때 모이는 사람들은 박형규 목사, 김상근 목사, 이경배 선생, 이재정 신부, 박경서 박사, 박상증 목사 등이었는데, 나는 그들에 비해 나이는 어리지만 자주 그 자리에 참석했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주로 민주화나 인권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나로서는 그 자리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김관석 목사나 박형규 목사는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자리에 나를 부르는 이유가 ‘젊은 사람이 행동에 나서야지.’라고 하는 무언의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나는 김동완 목사(당시 반석교회 전도사)를 만나 부활절연합예배 소식을 전하면서 그동안 품어온 생각을 말했다.
“김 전도사,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암담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언론은 입도 뻥끗하지 않잖아? 이러니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 않겠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마침 김관석 목사님으로부터 부활절연합예배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어. 오랜만에 열리는 부활절연합예배라 사람들이 많이 참석할 것 같아. 우리가 처한 현실을 그날 모인사람에게라도 알리면 어떨까 싶어.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이 부활절연합예배를 활용하면 어떨까?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을 최대한 바르게 고발해보자는 거지. 그런데 이일에 수도권이 나서게 되면 수도권의 존재 자체가 흔들릴 수 있을 거야. 무조건 수도권의 피해는 최소화 해야 하거든. 수도권 외에 이 의견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야. 필요한 인원은 다른데서 채우고, 우선 수도권에서는 나 혼자만 이 계획에 참여할 생각이야.”
평소 정부에 대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김동완 목사는 이 계획에 흔쾌히 동의했다. 어려움이 따를 것이고, 고난을 겪게 될지 모르는 일에 선뜻 나서준 김동완 목사가 참 고마웠다. 지원군을 얻게 되자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할 일들을 구상해나갔다.
나는 우선 부활절연합예배의 대회장을 맡은 유호준 목사를 찾아갔다. 처음 만난 자리였지만 용기를 내어 부활절연합예배 때 우리가 기도 제목 열개를 준비할 테니 행사장에 걸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유 목사는 일절 대꾸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헀지만, 내심 기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실망스러웠으나 어쩔 수 없이 우리 끼리 해야 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유 목사가 정보원들에게 내가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유 목사에게도 정보를 캐내기 위해 정보원들이 상주해 있었을 텐데 말이다. 만약 유 목사가 정보원들에게 내가 한 이야기를 전했다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잡혀가고 말았을 것이고, 계획은 허사로 돌아갔을 게 분명했다.
유 목사에게 거절당한 후 나는 내가 연결할 수 있는 인맥을 찾아 나섰다. 수도권 사람들은 제외해야 했으니 다른 쪽에서 이 계획을 발설하지 않을 만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때 진산전 씨가 떠올랐다. 그는 내가 금화아파트에서 활동할 때 함께 일을 했고, 또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나서면 수도권이 위험해지니 중간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주민들에게 동참하자는 말을 하게 할 계획이었다.
중간다리 역할을 해줄 사람으로 생각한 것은 남삼우 씨였다. 오재식 선생은 KSCM에서 그를 만났는데, 생각이 바른 젊은이라고 소개해주어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나는 남삼우 씨가 진산전 씨를 잘 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진산전 씨 또한 알고 있었다. 진산전 씨는 자치운영위원회 회장으로 서울시청 앞 광장시위에서 조직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었다.
나는 남삼우 씨를 만나 이번 부활절연합예배에 많은 사람이 모이니 이 기회에 많은 사람에게 독재정권의 실상을 알리고, 기도를 부탁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조직활동에 경험이 있는 진산전 씨를 동원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당시 남삼우 씨는 1971년 5월 제8대 국회의원 입후보자 공천과정에서탈락하자 국민당을 나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려고 하고 있었다, 그 역시 독재정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차러 우리는 쉽게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즉시 그의 형님 집으로 가서 밤새도록 연구하여 기도제목 열 개를 만들었다. 기도제목은 “박정희 대통령을 불쌍히 여기소서.”로 하고 싶었으나, 용감하지 못하게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로 정했다. “선혈의 피로 지켜온 땅 공산당이 웬말인가”는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북한에 다녀온 사실을 노린 문구였다. 혹시 발각되면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하지 않게 넣은 것이다.
그 외에는 “서글픈 부활절 통곡하는 민주주의” “사울 왕아,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꿀 먹은 동아일보, 아부하는 한국일보” “회개하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민주주의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이다” 등으로 정했다. 또 1973년 3월에 업무상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된 전 수도경비사령과 윤필용을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윤필용 장군을 위해 기도합시다”도 추가했다.
플래카드 제작은 남삼우 씨가 맡는다고 해서 그에게 일임했다. 플래카드는 광목 10m짜리로 열 개를 만들기로 했다. 남삼우 씨는 진산전 씨를 통해 플래카드를 제작해서 예배가 끝난 후 단상 주변에 펼쳐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계획했다.
전단을 맡은 나는 김동완 목사를 만나 학사단이 활동을 잘 하니 학사단 단장인 나상기 씨와 만나서 얘기를 해보라고 했다. 오랜 시간 만나서 이야기를 하려면 여관이 좋겠다 싶어 없는 돈을 털어서 숙박료를 건네주었다.
내 제안대로 김동완 목사는 서울제일교회 옆에 있는 수항여관에서 나상기 씨와 만나 하룻밤을 같이 지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날 밤 나상기 씨는 이 계획에 동참하기로 하고, 전단에 넣을 내용과 앞으로 어떤 일을 맡아 할지를 김동완 목사와 의논했다.
내가 김동완 목사에게 플래카드의 내용을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에 전단에 들어갈 내용을 정하는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