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주민교회 (30회)
  제6장 도시빈민은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

이후 한국에서 톤도의 소식을 들었다. 주민대표와 산토스 추기경, 은행 매니저가 함께 한 TV공개토론이 이루어졌는데, 방송 후에 톤도지역을 위해 가톨릭교회가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교황이 톤도를 방문했을 때 산토스 추기경의 약속이 공개되자 여론이 톤도지역 주민들의 편에 서게 된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들의 함성이 터져 나오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게 마련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냥 몬테디피다 은행 앞에 모여든 군중 속에는 하나님의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안타깝게도 주민들이 갈라져 더는 힘을 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필리핀 정부와 기업은 결국 톤도지역에 항구를 개발했다. 그 후 일부 주민들만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살게 되었고, 거기서 쫓겨난 대부분의 판자촌 주민들은 톤도 항구 주변에 다시 판자촌을 짓게 되었다. 지금은 그 당시보다 훨씬 더 큰 판자촌이 형성되고 말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 그 판자촌 주민들이 엄청나게 성숙했다는 점이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결과 삶의 태도와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그곳을 방문하는데, 그때 이야기만 나오면 톤도 주민들이 너무도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가난하지만 그 경험의 기억을 안고 있는 한, 그 전과 같은 판자촌 주민일 수 없다. 
 
▲ 톤도에서 함께 일한 빅트리시아 수녀
 
성남주민교회
 
수도권 총무간사인 나는 광주대단지의 실무를 맡았다. 그곳은 내가 1970년 8월 한 달 동안 학사단과 활동을 한 곳이다. 광주대단지폭동이 일어나기 전, 한 주민이 도움을 구하기 위해 만나자고 했을 때 가지 않은 나의 비겁함을 반성한 곳이기도 했다. 톤도에서 돌아온 1972년 4월, 나는 수도권 실무자로 그곳에 내려갔다. 

광주대단지는 8.10사건 이후 시로 승격되어 성남시로 불리고 있었다. 나는 먼저 주민지도자를 발굴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주민들을 만나 그들이 어려움과 필요를 듣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 주민지도자로 일할 만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인연이 있는 장동원 씨는 주민지도자로 적합한 인물이었다. 

주민을 조직하려면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1972년 5월에 KNCC로부터 5만원을 지원받아 성남시 수진동에 20평짜리 블록집을 하나 구해서 <주민교회>라고 이름 붙였다. 

주민교회라는 이름은 조승혁 목사의 아이디어였다. 조 목사는 알린스키가 세운 IAF(Industrial Area Foundation)에 훈련을 받으러 갔을 때 ‘피플스처치(people's church)’를 방문했다. 피플스처치는 시카고의 가난한 지역에 세워진 교회였는데, 여기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보고 조 목사가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내가 “왜 이름이 주민교회냐?”라고 물었을 때, 조 목사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주민교회라는 이름이 좋았다.

사실 주민교회를 세운 것은 주민들과 접촉을 쉽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예배를 드리는 공간보다는 주민조직을 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으로 활용할 목적이었다. 

서울 제일교회 전도사인 나는 주일에는 서울제일교회에 갔지만 주로 중부시장 노동자들과 형제의 집 일에 집중했다. 그래서 월요일에는 다시 성남으로 내려와 주민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주민교회는 주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병원 문제가 가장 시급했다. 당시 주민들은 아프거나 병이 들어도 쉽게 병원을 갈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병원을 세우는 과정은 주민들의 광범위한 참여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이는 주민조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눈여겨 본 주민지도자들과 함께 <성남주민병원설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위원장은 장동원, 부위원장은 김칠봉과 김경두, 총무는 신광호가 맡았다. 우리는 병원설립을 위해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했다. 먼저 병원설립에 관한 진정서를 작성했다. 

이 지역에 꼭 필요한 것이 병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주민들의 서명을 받았다. 주민들의 호응은 좋았다. 서명지를 받아서 이웃에게 돌려가며 자발적으로 사인을 받았다. 그리하여 총 8,000여 세대가 서명을 했다. 우리는 이 진정서를 관계당국 및 사회 각 단체에 보냈다. 

또 한편으로는 의료협동조합을 조직해 주민보건원을 설립하기 위한 작업도 추진했다.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주민보건원은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이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빈민들의 질병 예방과 치료에 관심이 있는 의사들을 중심으로 ‘주민보건원설립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준비위원회는 김일순(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 장기려(부산 복음병원장), 최태사(서울 일심의원 원장), 박태근(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박형규(수도권 위원장), 오재길(목축업 종사자), 조승혁(수도권 총무)으로 구성되었다. 

성남주민병원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작업도 착착 진행되었다. 성남주민병원설립추진위원회는 병원을 세우기 위해 성남출장소(성남지역 개발을 위해 필요한 업무를 담당했던 행정기관)와 접촉하였다. 성남출장소는 1964년에 광주대단지 개발에 대비해 광주군 직할 출장소로 바뀌었다가 광주대단지사건 이후인 1972년에는 시 승격에 대비하여 경기도 직할 출장소로 변경되었다. 

관계 행정기관과 얘기가 된 뒤 이번에는 병원대지를 마련하기 위해 모금을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의 호응과 성원으로 모금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보건원설립준비위원회의 도움으로 성남주민병원에서 치료를 담당할 의사도 정해졌다. 병원개원을 위한 성남출장소와의 협의도 잘 이루어졌다. 대지만 확보되면 우선 모자보건소부터 개원하기로 합의를 봤다. 

그러나 모든 이러한 활동이 일시에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은 10월 17일에 선포된 비상계엄령, 즉 10월 유심이었다.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초헌법적인 10월 유신으로 인해 주민들의 활동도 제약을 받게 되었다. 성남주민병원을 설립하기 위한 모든 활동도 일거에 멈춰야했다. 

성남뿐만 아니라 주민진료시설을 세우기 위해 준비 중이던 금화아파트 지역에서의 모든 활동도 중단되었다. 이곳은 내가 주민조직훈련 3기생일 때부터 관여해온 곳으로, 시청 앞 광장시위 때에도 이 지역 주민들의 주동적인 활약이 빛난 곳이다. 

수도권은 이 지역의 주민지도자인 진산전 씨와 손 잡고 주민조직을 위한 노력을 해오고 있었다. 금화지역 주민들은 1972년 4월부터 지역개발위원회를 조직하고, 5월부터는 간이진료소 설립을 추진하기 위해 주민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주민위원회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그동안 주민조직운동의 성과와 활약에 신뢰를 보내준 주민들은 진료소 설립을 이해서도 적극 나섰다. 

<진료소설립추진위원회>는 KNCC 애육위원회로부터 가족계획사업에 대한 지원을 받았다. 또 생명정의클럽으로부터는 의사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한 이 지역 교회들의 협의체인 <금화아파트선교위원회>의 주선으로 정동교회와 접촉하여, 교회 건물 내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필리핀 톤도에서 경험한 주민조직_2 (29회)
  수도권 재정비 답십리센터_1 (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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