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 (48회)
  제9장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항상 진지하던 성유보 선생은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사선이 만들어낸 광장을 통해 연대의식을 절감했기 때문에 그 자료집을 집필하는 책임을 맡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그런 자료집을 썼다가는 정보기관에 꼬투리가 잡혀 감옥에 갈수도 있었다. 

그 자료집은 두께도 엄청나고 판형도 크다. 나는 아직도 자료집에 수록된 그 막대한 자료들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모르겠다. 743쪽이나 되는 이 자료집은 성유보 선생과 천영초 간사가 가장 힘을 쏟았지만, 자료 준비를 위해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드러나지 않는 그 모든 사람에 의해 이 자료집은 발간될 수 있었다. 

이 자료집의 이름은 <1970년대 노동현장과 증언>이다. 출판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풀빛출판사가 그 일을 해주었다. 이 지면을 빌려 성유보, 천영초 간사의 이름을 늦게나마 공개하며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아울러 이 자료집 서문에 있는 나의 인사말을 내가 쓰지 않았다는 점도 밝힌다. 다만 이 자료집에 많은 사람의 이름을 넣은 것은, 그렇게 해야 정보기관에서 트집을 잡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 나의 아이디어이다. 성유보 선생이 세상을 뜨기 두세 달 전, 나는 선생과 종로에서 만나 메밀국수를 먹고 차를 마셨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기독교인들이 옛날처럼 일어서야 합니다. 목사님들이 일어설 때입니다.”

박근혜 정부 때였다. 나는 광화문광장에서 연일 벌어지는 촛불집회를 보며 성유보 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촛불집회가 열리는 광화문 그곳은 그가 있을 자리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여러 번 가택수색을 당하는 바람에 가지고 있던 자료의 상당수가 훼손되거나 소실되었다. 나 자신이 자료수집을 꺼리는 습성도 있다. 그래서 자료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책장을 살피다가 <1970년대 노동현장과 증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책 사이에 <사회선교 세미나 보고서>가 한부 들어 있었다. “노동문제 현안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부제가 달린 세미나 보고서였다. 1981년 2월 10~11일에 열린 이 세미나에서는 노동문제의 당면 현안을 살피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당시 사선은 노동문제가 단순한 노동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자 전 국민의 경제적 문제이며, 아울러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이라고 보았다. 이 보고서는 기독교인의 신앙양심에 충실하고자 산교적 차원에서 교회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당시 사선의 활동과 이 세미나의 이해를 돕고자 보고서의 전문을 이 채책 마지막에 수록한다. 

이와 함께 사선의 성명서 가운데 하나인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한국어와 영어 원문 그대로 싣는다. 미국 교회에 보내진 영어본은 미국 교회에 의해 다시 미국무부에 전달되었다. 이제 와서 사실을 밝히지만, 이 성명서는 나의 지시로 천영초 간사와 그녀의 남편 정문화 씨가 작성한 것이다. 기관원들이 작성한 사람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내가 썼다고 딱 잡아떼니 그들도 하는 수 없이 그냥 넘어갔다.   
 
▲ 천영초 / 사선 간사를 지냈다. 광주(光州) 출신으로 고려대 신방과를 나와 민중신학에 경도되어 한신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70년대 여학생 운동권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출처 ; 블로그 the impression issue]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

미국이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세력을 용인 또는 묵인하자 젊은이들의 반미감정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이 1980년 8월 8일자 <울스트리지 저널>에 “한국 군인들은 들쥐(lemmings)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그 지도자를 따라갈 것이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한편 주한 미 대사인 워커는 몰롬비아 해변에서 한국대학생들을 가리켜 “버릇없는 아이”(spoiled brats, 개새끼라는 의미도 된다)라고 했다. 이러한 발언은 젊은이들을 더욱 자극시켰다. 

학생들의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미 문화원사건이 발생하고, 관련 학생들이 관계기관에 구속되고, 이와 관련한 사람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지도위원인 최기식 신부가 관계기관에 끌려가고 할 때, 사선 실행위원회는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성명서를 내기로 했다, 성명서는 초안을 검토하고 수정해서 내기로 했는데, 해외에 출장 중인 사람들에게는 미리 위임을 받고,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전화로 확인을 받아 4월 15일에 성명을 발표했다. 

기관과 언론에 의해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반미성명서>라고 이름 붙여진 이 성명서는 설명이 좀 필요하다. 당시 모든 신문은 성명서의 진위를 취재하는 대신 거의 대부분 성명서를 비판하고 성토하는데 주력했다. 비판의 내용도 한결 같아서 누가 써준 것처럼 보였다.

성명서가 발표된 후 5~6일이 지나서 언론사에서 일제히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는데, 기사 내용은 거의 똑같았다. 기관원들은 실무 책임자인 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구교 대표들이나 사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성명서를 매도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자 온갖 보수단체들이 사선을 용공이라고 비난했다. 검찰은 사선 지도위원을 한두 사람씩 연행해가기 시작했다. 나는 4월 22일 검찰에 자진출두 했다. 그런데 한 검사가 나를 보자마자 “야이, 뻔뻔한 새끼야!”하면서 상소리를 내뱉었다.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그를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KNCC가 성명서를 낸 후, 많은 양심세력이 성명서를 내기 시작했다. 위컴 사령관은 노코멘트, 워커 대사는 부인 내지 변명을 했지만 사이비단체들은 사선에 온갖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이 성명서로 인해 사선 임원과 지도위원, 그리고 실행위원들이 거의 다 잡혀갔다. 모두 자진출두형식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 조사를 받은 다음 2, 3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즈음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배후인물인 김현장 씨를 최기식 신부가 숨겨주었다가 조사를 받은 일이 있었다. 사선 실행위원인 이창복 선생이 이 일과 관련하여 남영동에서  조사를 받았다. 소식을 들은 나는 원주에 가서 지학순 주교를 만났다. 그는 이창복 선생이 고문을 당했다며 무척 마음 아파해했다. 

지학순 주교가 그리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선 이름으로 이창복 선생이 고문당한 사실을 폭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몇 사람이 새벽에 들이닥쳐 나를 남영동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나를 고문실로 데려가 김근태 등도 이곳에서 고초를 당했다며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욕조로 데리고 가는 시늉을 했다.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물고문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아찔해지기도 했지만, 그들은 외협만 할뿐 물고문은 하지 않았다. 
나는 남영동에서 그 유명한 ‘백대가리’도 보았다. ‘백대가리’는 우리 사이에서 유명한 고문기술자였다. 

남영동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이 되자 그들은 갑자기 나와 이창복 선생을 대면시켰다. 이 선생이 온 것을 보고 나는 굉장히 당황했다. 그들이 이 선생을 데리고 올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선생은, 자신은 고문을 당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렇게 말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지금도 그때 일들을 떠올리면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남영동에 들어간 지 3일 정도가 지나자 그들은 나를 내보내주었다. 다행히 고문은 당하지는 않았지만 남영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사선에서 일하면서 별별 일을 다 경험했지만, 남영동에서 경험한 사흘은 그중 가장 끔찍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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